[내 인생의 영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디지`털`, <몬스터 주식회사>
2002-06-27

몬스터 주식회사(Monsters, Inc.)2001년, 감독 피터 닥터, 데이빗 실버만, 리 언크릭애니메이션에 대한 나의 좋은 기억 중 대부분은 디즈니와 관련된 것이다. 또래 친구들이 재패니메이션에 매료됐을 때도,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고 사람들이 주장해도, 나는 여전히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사로잡혀 있었다.

분명 <곰돌이 푸우> 때문이었을 거다. 유치원 다니던 무렵이던가. 꿀단지에 손을 담근 채 순한 표정을 짓기만 하는 곰 푸우와 소심한 돼지 피글렛, 낙천적이기 그지없는 호랑이 티거, 걱정거리만 안고 사는 당나귀 이요, 친구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수다쟁이 토끼 래빗 등이 올망졸망 모여 사는 마을에 초대받았던 때가 말이다. 이 평화로우면서도 즐거운 소동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 이끌렸던 나는 집에 있던 번역본 <곰돌이 푸우> 동화책뿐 아니라, 영어로 된 그림책도 외우다시피 읽고 또 읽었다. 10대가 되고서 일요일 아침 KBS2TV <만화동산>에서 푸우와 그 친구들을 재회했을 때, 그리고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교보문고에서 영어판 푸우 포켓북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지(나는 이 포켓북 시리즈를 거의 모두 갖고 있다). 어린 날, 그리고 한참 뒤에도 왜 푸우에 마음이 끌렸는지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주위 사람들은 단것을 좋아하는 날 보고 푸우와 닮았다고도 하지만, 뭐 그런 것보다는 어린 날 내가 동화(同化)됐던 캐릭터에 대한 애정과 그 시절 가슴을 가만히 두드렸던 아스라한 감성 탓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던 나에게 지난해 겨울 장편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의 음악 선곡을 할 기회가 생겼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그중에도 <곰돌이 푸우>와는 극에 놓인 애니메이션이지만 흥미로울 듯해 참여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이 영화의 사운드 슈퍼바이저인 이성진씨는 <몬스터 주식회사>의 사운드가 무아지경의 세계라며 칭송을 했다. 그의 말을 들은 뒤, 그저 참고나 하자는 셈치고 한 극장을 찾았던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과연 픽사야!”라며 외친 오프닝부터 마지막 “역시 픽사구나!”라면서 끝날 때까지, L전자회사의 CF 카피에서처럼 ‘디지털이 주는 감동’을 받을 줄이야!! 내 머릿속은 그 덩치 큰 털북숭이 괴물 설리의 털을 한번만 직접 만져봤으면, 하는 생각으로 차올랐다. 온몸에 나쁜 푸른색 식용색소가 가득 섞인 것 같은 설리의 푸르고 하늘거리는 털이 이 영화 속으로 날 파고들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는 비밀이었지만 설리에게서 떨어지기 싫은 부의 모습, 부를 보내고 부서진 부의 방문 조각을 들고 있는 두툼한 털북숭이 설리의 그 손을 보고는… 앗! 잘못해서 눈꺼풀을 한번만 더 깜빡이다가는 눈물이 나의 볼 위로 떨어질 것 같았다. 고인 눈물이 마를 때까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어설픈 수법으로 위기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극장을 나올 때 속으로는 갖은 찬사를 보내면서도 가식적인 점잔을 떤 기억이 난다. 이런저런 내용보다도 단 한컷의 이미지에 매료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한 장면에 오랜 시간 그들이 그려낸 흔적들 모두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장면은 어린 날 <곰돌이 푸우> 동화책에서 본 뒤 내게 슬픔을 안겨줬던 한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했다. 꿀을 먹으며 풍선을 타고 날아가던 푸우가 벌들의 습격을 받아 땅바닥에 떨어진다는. 그게 왜 그리 서글펐는지 이제 와선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지만, 하여간 어린 마음은 따끔한 뭔가에 찔려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지금, 이 디지털로 만든 털북숭이가 유년의 기억과 감정을 고스란히 끌어올리다니.

얼마 전 어린이대공원을 지나가다가 부같이 머리를 예쁘게 딴 꼬마가 푸른색 솜사탕을 들고 인도를 지나는 모습을 본 나는 저 솜사탕이 혹시 설리의 털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설리의 털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볼 수 있었던 털 중 가장 부드럽고 아름다운 털이었다. 그 털은 ‘디지털’이었는데 말이다.

글: 장민승/ 음악 슈퍼바이저·<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아치와 씨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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