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골목의 비정한 질서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장르영화지만 <친구>의 야심은 남다른 데가 있다. 자신이 직접 겪은 사건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곽경택 감독은 난폭하고 잔인한 조직세계에 대단한 관심을 기울이진 않는다. 그가 재현하려는 것이 90년 부산을 떠들썩하게 했던 국제나이트클럽 살인사건의 진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독차의 뿌연 연기를 뒤쫓는 벌거숭이 동네꼬마들을 담은 첫 장면이 암시하듯 <친구>는 낯선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어른들에게 잃어버린 어떤 기억을 되살리려 한다. 그 시절 들뜬 마음으로 여고축제를 찾았던 까까머리 친구들에게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졌던 무언가가 성인이 되고 난 어느 날 흔적 없이 증발해버렸다. <친구>는 이곳의 탁한 공기에 희석되어 사라진 언덕 저 너머의 청명한 시간들을 그리워하는 영화다.
13살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대순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감독의 분신인 상택의 눈을 거쳐 화면에 자리잡는다. 상택은 모범생이던 자신과 달랐던 두 남자, 준석과 동수를 떠올린다. 고등학교 시절 뗄래야 뗄 수 없는 짝패였던 그들은 우정이 한눈을 파는 짧은 시간 적대적인 두 폭력조직의 행동대장이 되고 상대를 향한 칼부림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멜로드라마의 연인들처럼 그들은 알 수 없는 운명에 상처입고 좌절하지만 결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조직의 생사를 건 싸움을 예감한 준석이 동수를 찾아갔을 때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더이상 진심이 통하지 않는 어른들의 너덜너덜한 삶을 보여준다. 친구로서 마지막 부탁이라며 “하와이로 가라”는 준석의 말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동석이 답한다. “니가 가라. 하와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등장인물들을 밀어넣는 무자비한 힘이 폭력조직의 먹이사슬만은 아니다. 아버지가 조직의 보스였던 탓일까? 10대 시절부터 어른스럽던 준석은 뺨을 쥐고 때리며 “아버지 뭐하시노?”라고 말하는 야비한 선생에게 대들 줄 알았다. 일찍 야만스런 세상에 눈뜬 아이들은 위험천만한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창백한 불빛 아래 매일매일 시체를 염하는 것만이 상상할 수 있던 유일한 미래였던 장의사집 아들 동수도 그래서 악마와 거래하기 시작한다.
부산의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삼은 <친구>에서 억양까지 적절히 살린 사투리는 잠자던 추억을 깨우는 데 한몫한다. 유오성, 장동건은 물론 작은 배역까지 대사와 표정과 동작을 섬세하게 연출했기에 다소 장황한 이야기에도 집중할 수 있다. 대체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 주인공이 영웅적으로 부각되고 그래서 식상하기 쉬운 영화지만 유오성과 장동건의 카리스마는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비트>나 <간첩 리철진>에서도 그랬지만 유오성은 각진 얼굴에 무엇이든 새길 수 있는 배우다. 분노에 일그러진 표정을 삼키며 이를 악문 목소리를 흘려보내거나 온기가 배어나는 살가운 모습을 내비칠 때나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은 균형을 잡는다. 장동건이 보여주는 살의가 이글거리는 눈동자도 잊기 힘들 것이다. 조각 같은 외모에 감탄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곽경택 감독이 전작 <닥터K>에서 연기조율에 실패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친구>는 배우들의 에너지가 불러오는 상승작용이 대단한 영화다. 여기엔 녹색톤을 살린 화면도 크게 기여한다. 뇌세포에 오래 적신 듯 약간 바랜 색감이 회한의 감상을 자극하며 등장인물의 얼굴이 어둠에 잠겨도 표정은 감춰지지 않는다. <친구>의 카메라는 때로 아드레날린을 주체못하는 듯 질주하지만 슬픈 예감에 사로잡힐 때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는 여유도 잊지 않는다.
비교적 탄탄한 드라마로서 대견하다고 할 수 있지만 아쉬운 대목이 없는 건 아니다. <친구>는 허세를 부리느라 몹쓸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 어리석은 수컷들 편에 선다. 그것은 이 영화가 그토록 안타까워 하는 추억에 우정 말고 다른 무엇이 개입하기 어렵게 만든다. 일례로 <친구>는 상택에게 키스의 달콤함을 일러주고 준석의 아내가 된 여인 지숙을 그다지 염려하지 않고 가족이 잉태한 불행의 원천에도 가깝게 다가서지 않는다. 시간의 비밀을, 운명의 정체를 밝힐 수도 있던 영화는 이런 대목에서 일찍 욕심을 접고 익숙한 장르적 결말에 이끌리는 것이다.
<억수탕>으로 데뷔해 <닥터K>에서 고배를 마셨던 곽경택 감독은 세 번째 영화 <친구>에서 숙련된 장인의 솜씨를 발휘한다. 뮤직비디오의 리듬감이 살아있는 달리기 시합 장면, 극장에서 벌어지는 패싸움, 빗속에서 벌어지는 살인 시퀀스 등이 우아하고 매끄러운 액션 연출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술적 완성도가 우선은 아니다. <친구>가 매력적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보다 감독의 진심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 시절 친구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튜브에 매달린 개구쟁이들의 목소리로 되살아난다. “니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하고 바다거북이하고 헤엄치기 시합하믄 누가 이기겠노?” 그런 호기심을 잃은 지금 이곳은, 철든 어른들만 살아남는 음흉한 세상이다.
남동철 기자 namdong@hani.co.kr
있어야 할 곳에, 그들 있었다...<친구>의 배우들
중호 역을 맡은 배우는 연극배우 출신인 정운택. <세일즈맨의 죽음> <유리가면> 등의 연극에 나왔다. 실제 중호는 지금 부산에서 횟집을 경영하고 있다고. 진숙으로 나온 김보경은 CF모델 출신으로 드라마 <초대>에 출연한 경력이 있지만 영화는 처음이다. 적당히 퇴폐적인 매력을 풍기는 그녀는 상택의 첫 키스 상대가 되어주지만 결국 준석과 결혼해 마약에 찌든 남편에게 핍박받는다. 상택이 폐인이 된 준석을 찾아갔을 때 데이트하자고 말하는 장면에선 궁핍한 삶에 찌든 여인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준석의 아버지 역은 주현이 맡았다. 곽감독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주현을 염두에 뒀다. 잠깐 나와도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인물이라야 된다는 점에서 주현의 캐스팅은 적절하다. 그는 <해피엔드>에서 최민식이 자주 가는 헌책방 주인으로 나오기도 했는데 그 나이대 연기자가 궁색한 영화계로선 주현의 존재가 반갑다. 준석이 가담한 조직의 보스로는 기주봉이 출연한다. 곽감독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수사반장을 맡았을 때 보여준 연기가 인상적이었고 실제 모델인 인물과 비슷한 풍모라는 점에서 그를 택했다. 동수의 조직 보스로 나온 배우는 현재 부산예대에서 연기를 지도하고 있는 교수 이재용. 그는 <친구>에서 아역 배우들의 연기지도까지 맡았다. 곽감독의 영화에만 출연해 낯선 얼굴이지만 <친구>에서 보여준 비열하고 잔인한 조직 보스 연기는 한눈에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