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욕 배우느라 욕봤네! <라이터를 켜라> 김채연
2002-07-04
글 : 위정훈
사진 : 오계옥

CF의 한 장면처럼 기차 안에서 우아하게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던 중 조폭과 백수의 급습(?)을 당해 터프한 본색을 드러내는 비운의 여인. 조폭에게 뺏긴 300원짜리 라이터를 되찾으려는 백수가 국회의원으로부터 밀린 빚(?)을 받으려 조폭이 탄 열차에 따라타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코미디 <라이터를 켜라>에서 기차 안의 ‘홍일점’ 승객으로 등장하는 김채연의 첫인상은, <상실의 시대>를 읽고 있는 영화 속 첫 등장장면처럼 몹시 여성스럽다. 하얀 얼굴도, 커다란 눈도, 무용으로 단련된 날렵한 몸매도.

<라이터를 켜라> 시나리오상에서 봉구(백수), 철곤(조폭) 등 주요 등장인물을 뺀 나머지 배역의 호칭은 ‘껄떡남’, ‘수다남’ 등이다. 김채연은, 민망하게도 ‘싸가지’. 현장에서 함께 밥을 먹던 남자 선배들은 그를 빤히 쳐다보다 갑자기 “야, 밥 싸가지” 하고 놀려대기 일쑤였다. 이 참해 보이는 배우가 ‘싸가지’ 역을? “장항준 감독님이 그런 부조화를 원했어요. 처음엔 참하게 보이다가 본색을 드러내면 잡초 같은 삼류인생을 살아온 여자의 캐릭터를요.” 남자들의 이야기를 주로 하는 영화이다보니 여성스러움을 감추고 끈질기고 다혈질적인 여자를 보여주자고 생각했고, 그 연기에 몰두하다보니 영화촬영 뒤에 TV드라마를 찍는데 “왜 그렇게 선머슴 같이 연기하냐”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다.

‘싸가지’는 “야 이 XX야”에서 시작해, 말끝마다 온갖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구사해야 하는데,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거친 ‘양가집 규수’가 욕설을 퍼붓는 대사를 단박에 OK받기는 아무래도 무리였을 터. 욕을 퍼붓는 장면에서 첫 NG를 냈다. 그뒤로 현장에서 너스레 잘 떠는 박영규씨는 지나가다가도 김채연만 보면 ‘욕하기’ 레슨을 하자면서 놀려대기 일쑤였다고.

김채연이 스크린에 등장한 것은 <라이터를 켜라>가 처음이지만, 연예계에 데뷔한 지는 벌써 4년이 된다. 대학 2학년 때 여성지 독자모델 사진을 보고 매니지먼트사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 몰래 레모나 CF를 찍었고, CF를 본 주변에서 “당신 딸 예쁘더라, 잘 키웠네” 소리에 흐뭇해진 아버지는 더이상 반대하지 않았다고. KBS 미니시리즈 에서 배두나의 친구로, 시트콤 <멋진 친구들>에서 공주병 방송작가로 출연했고, 라디오 프로그램 <뮤직토크 김채연입니다>에서 DJ를 하면서 경력의 스펙트럼을 한뼘씩 넓혀가는 중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월드컵 4강에서 격돌한 한국 대 독일전에서 붉은 악마가 내건 카드섹션 문구는 김채연에게도 100% 적용된다. 3년 전, <R.N.A.>에 출연하던 당시, 안 풀리는 자신에게 좌절하고 실망했을 때 3년 뒤의 자신을 그리면서 가상의 일기를 썼다. “무척 바쁜 하루였다. 오늘의 촬영 스케줄은…, 나의 연기는….” 3년이 지난 지금, 그 주문의 마법에라도 걸린 듯 실현됐다. 그는 내친김에 뒷장에 잔뜩 욕심을 부린 2년 뒤의 가상일기를 써두었다.

김승우, 차승원, 강성진, 박영규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의 촬영은 “그저 시키는 대로 했어요”라고 말할 만큼 무서운 현장학습을 체험하는 시간이었고, 그런 면에서 이미 “개인적으로 성공한 작품”이다. 현재 MBC 일요 아침드라마 <사랑을 예약하세요>에서 발랄한 호텔직원으로 출연중인 김채연은 연예계 활동을 시작하면서 오래 쉬었던 학업을 재개한 상태. 신라대학 무용학과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하고 있다. 무용이냐, 연기냐 아직 고민하고 싶지 않지만 연기는 김혜자 선배님만큼 오래했음 좋겠고, <물고기자리>의 주인공처럼 뭔가에 집착하는 ‘미친 여자’를 꼭 해보고 싶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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