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105번째 영화 <너 없는 나> 만든 충무로의 전설 남기남 감독
2002-07-10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이혜정
흥행의 맛, 다시 한번

남기남(60) 감독이 돌아왔다. 98년 <천년환생>과 <망치를 든 짱구와 땡칠이> 이후 3년 만에 신작 <너 없는 나>를 완성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남기남의 105번째 영화. 젊은 세대엔 낯선 이름이지만 남기남은 80년대 이주일 주연의 <평양맨발>, 심형래 주연의 <영구와 땡칠이>를 히트시킨 흥행감독이다. 한해에 9편까지 찍은 적 있는 빨리 찍기의 대가 남기남 감독은 임하룡, 이성미 주연의 <철부지>를 촬영 6일 만에 해치운(?) 기록을 갖고 있다. 70년대 외화 수입쿼터를 목적으로 저예산영화를 양산하던 시절, 그는 누구보다 빨리, 많은 영화를 찍는 통에 충무로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 <P> 89년 비공식 흥행신기록을 세운 걸로 알려진 <영구와 땡칠이>는 남기남식 영화만들기의 정점이었다. 이 영화에서 어린이 영화시장의 가능성을 확인한 심형래가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동안 20여년간 제작자들의 총애를 받던 남기남 감독은 홀로 자기 길을 개척할 상황에 처했다.

그는 91년부터 직접 제작·감독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남기남의 시련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그는 재산을 하나씩 정리했다. 집은 담보를 잡혔고 땅은 팔았다. 무려 32억원을 날리고 99년에 이르러 그는 “죽을 생각을 할” 정도로 실의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주변의 도움을 얻고 남은 재산을 처분해 다시 현장에 돌아왔다. <너 없는 나>는 그렇게 완성됐다. 자신의 이름 이니셜을 딴 NKN필름은 현재 남기남 연출부 출신 정창욱 감독이 연출하는 <달랠 걸 달래야지>와 남기남 감독의 신작 <뉴 수퍼맨 길동>을 준비중이다. 90년대 이후, 관객은 그의 영화를 외면했건만 영화를 향한 그의 애정은 전혀 식지 않았다.

-<너 없는 나>는 언제 준비한 작품인가? 빨리 찍는 걸로 유명한 감독인데 촬영이 꽤 오래 걸렸다.

=2000년 12월에 준비를 시작했다. 안지원이라는 작가에게 소재와 이야기를 주고 2001년 3월쯤 시나리오가 마무리됐다. 4월에 첫 촬영에 들어갔는데 이듬해 4월에 마지막 촬영을 했다. 사계절을 다 담았고 횟수로는 30번 정도 촬영 나가서 찍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촬영이 길어졌다. KBS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날 취재해서 5부작 다큐멘터리로 보여준 적이 있다. 그때 이 영화 준비하는 게 나왔는데 프로그램 나오고 바로 개봉했으면 좋았을 걸 시기를 못 맞췄다. 극장 날짜가 잡히면 재방송이 가능한지 알아보려고 한다.

-98년 이후 3년 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9년부터 1년 이상 정신적, 경제적으로 방황했다. 90년대 들어서 개인 투자로 9편을 만들었는데 32억원 정도 까먹었다. 집도 날리고 땅도 뺏기고. 실의에 빠져 있었는데 주변에서 용기를 많이 줬다. 물러서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다시 해보자 싶어서 이번 영화를 만들었다.

-실의에 빠졌을 때 다시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계기가 있나.

=사실 죽어버리자는 생각도 했다. 나이는 50대 후반인데, 내일모레 60인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오직 영화밖에 없더라. 그 좌절 속에서 아픔 이기고 다시 하자고 생각할 때는 주위에 영화하던 동료,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다. 남들은 10억, 20억원 있어야 찍지만 난 5억원만 있으면 남들 10억원 들인 영화를 찍어내니까 해보자, 그랬다. 내 돈이 1억4천만원쯤 있어서 그걸 갖고 시작했다. 후배 하나가 투자해줘서 촬영까지 마치고 나니 녹음비용이 또 5천만원쯤 들더라. 작품을 담보로 녹음비용을 마련했고 겨우 완성하게 됐다.

-어렵게 찍었는데 이제 개봉이 문제다. 수익을 내야 할 텐데 대안이 있나.

=영업적인 문제는 잘 모르지만 극장이나 비디오회사 관계자들이 시사회를 봤으니 뭔가 돌파구가 나오지 않겠나. 순수한 자본금만 빼주면 다음 작품을 할 수 있을 거다.

-소재와 스타일이 전작들과 상당히 다르다. 어린이 관객이 타깃인 SF나 코미디영화 또는 주먹액션영화를 많이 찍었는데 이번 영화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다. 이런 영화로 방향을 바꾼 이유가 있나.

=70∼80년대에 내가 만들었던 영화들, 남기남 스타일을 후배들이 모방해서 만들고 있는데 다시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조폭영화니 조폭코미디니 하는 거 다 내가 20∼30년 전에 했던 건데, 다들 그렇게 오락 위주 작품만 가는데 나는 거꾸로 아름다운, 정서적인 이야기로 가보면 낫지 않겠나 싶더라. 남기남이 오락 위주 드라마만 찍은 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걸 탈피해서 반대로 가도 되지 않겠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내 기획엔 톱스타 캐스팅이 없어서 선전에 어려움이 있다. 제작비 조달에 문제가 있어서 청순한 신인 위주로 갔더니 크게 광고할 여유가 없다. 나 나름대로 아름다운 작품을 하나 빼봤는데 창고에 썩힐 순 없고…. 여름방학 동안은 워낙 대형영화들로 스케줄이 채워져 있으니 가을쯤에 개봉하면 어떨까 싶다. 청소년 선도를 위한 가정적인 영화니까 반응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데뷔 초기엔 멜로드라마를 몇편 찍은 걸로 안다.

=순수성을 찾는, 눈물 나는 영화를 꽤 찍었던 적이 있다. 데뷔작 <내 딸아 울지마라>도 그렇고. 멜로드라마 찍다가 무술영화를 찍게 되고 <평양맨발> 하면서 코믹액션을 찍었다. 지금 현재 젊은이들이 갈구하는, 흥행영화들을 이미 80년대에 만들었다.

-다른 감독의 영화도 제작할 예정이라던데.

내 조감독 출신 정창욱 감독의 블랙코미디 <달랠 걸 달래야지>를 7월 하순부터 찍을 예정이다. <너 없는 나>는 내가 나의 기(氣)를 살리기 위해 만들어놓은 거니까 다음엔 후배를 양성하는 쪽으로 갈 생각이다. 내가 촬영에 대해서는 노하우가 있으니까 젊은이들과 협조해서 타협해가며 만들면 좋은 영화가 나올 거라 믿는다. 정창욱 감독은 안소영, 이대근 주연의 <합궁>부터 10년간 내 조감독을 했고 최근에 <마고> 조감독을 한 친구다.

-<달랠 걸 달래야지>는 투자자가 있나? 아니면 <너 없는 나>의 수익이 나와야 촬영하는 건가.

=투자자가 따로 있다. 일단 7억원이 확보돼 있으니까 후반작업이나 선전비 문제만 해결되면 된다.

-<달랠 걸 달래야지>말고 직접 연출할 작품도 준비중이라고 들었다

=홍길동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다. 홍길동이 슈퍼맨처럼 나는 게 아니고 돗자리타고 하늘을 나는 식이다. <뉴 수퍼맨 길동>이라는 제목인데 지금 캐릭터를 기획하고 있다. 홍길동의 생가가 전남 장성군인데 홍길동 국제학술심포지엄이 열려 참관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의 박사도 홍길동의 행적에 대해 연구, 발표하더라. 일본 사람들은 홍길동이 일본에 건너갔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그는 ‘붉은 벌’로 불렸다. 그래서 캐릭터도 붉은 벌의 이미지로 만들 작정이다. 붉은 벌의 형상을 닮은 망토를 두르고 가슴엔 붉은 벌을 그려넣고 붉은 장화를 신고. 하늘을 날면서 온몸에서 무기가 나오는 식이다. 컴퓨터그래픽이 30분 이상 들어가는 영화라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캐릭터 디자인부터 준비하고 있다. 스판 소재로 의상디자인도 하고.

-영화하다 경제적 손실을 많이 봤는데도 여전히 영화에 열정이 대단하다. 자꾸 영화현장에 끌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영화를 예술이라고 단정짓고 싶진 않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상으로 표현하고 많은 관중이 봐줄 때 정말 좋다. 내 이야기에 동화되고 웃고 감동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뭔가 발표해서 남을 즐겁게 하는 걸 좋아했고 잠재의식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죽어도 영화 속의 남기남으로 남고 싶은, 내 속에 그런 의협심이 있는 거 같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 제작, 감독한 영화들이 연달아 흥행에 실패했다. 관객이 남기남 영화를 찾지 않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영화를 만드는 것만 신경썼지 사업적인 면, 영업적인 면을 너무 몰랐다. 내 영화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선전을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감독으로서만 노력했지 사업쪽에선 빵점이었다. 이제는 영화선전, 홍보, 배급이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시대가 됐다. 확실한 배급망과 연결되지 않으면 만들어도 소용없다. 더이상 빨리 찍는 게 문제가 아니다. 1년에 1편을 하더라도 투자, 배급, 홍보가 제대로 돼야 한다. 내 경우는 10억원 드는 영화를 5억원에 만드는 노하우는 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달랠 걸 달래야지>는 홍보, 배급사와 합의된 다음에 크랭크인할 생각이다. 만들어놓고 극장 잡느라 고민하던 나처럼 안 되도록. <너 없는 나>는 빨리 좌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 배급에 대한 생각도 없이 촬영했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안 할 생각이다.

-<너 없는 나>를 찍으면서 경제적인 문제말고 아쉬웠던 부분은 어떤 것이었나.

=아무래도 배우들이 신인들이라 아쉽다. 캐스팅이 약하니까 선전에 애를 먹는 거 같다. 하지만 어린 배우들이 그래도 청순하고 아름답게 해줬다. 내 기분에는 젊은 학생이나 부모 세대 모두에게 감동적인, 욕먹지 않을 정도의 드라마를 빼냈다고 본다.

-요즘 영화계에서 보기드문, 현장에서 뛰고 있는 노장 감독인데 동세대 감독들이 영화를 못 찍고 있는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가슴이 아프다.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것 같다. 둘러보면 임권택 선배말고 거의 없다. 20대, 30대 감독의 영화가 전부다. 몇년 전에 우리 세대를 우습게 보던 후배 감독들도 벌써 작품 활동 못하는 상황이 됐다. 우리를 괄세하더니 남기남만도 못하고 있다. 그렇게 선배들 뒤통수 치고 자기들은 안 늙나? 요즘 영화들 보면 20∼30년 전 내가 흥행시켰던 영화들 생각이 난다. 그런 영화들 흥행하는 것과 비교하면 그때 왜 나한테 저질 감독이라고 그랬는지 모르겠고. 젊은 감독들이 예전에 내 영화만도 못한 걸로 엄청난 흥행을 하고 있는데 그걸 다시 한번 맛보고 싶어서 내가 이렇게 꿈틀대고 있지 않나 싶다. 또 한번 흥행하면 다시 저질 감독이라고 할 것인지 그 소리가 한번 듣고 싶다. 이제 60대에 접어들었는데 남기남은 영화 속에 파묻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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