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만만치 않은 예산의 블록버스터 <아 유 레디?>의 주인공으로 김정학이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정학이 누구야?”라고 수군거렸다. 누군가는 “드라마에서 본 것도 같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연풍연가>에 나오지 않았나?”며 갸우뚱거리기도 했다. 올해 초 <아 유 레디?>의 촬영이 한창일 때, “그 친구 <공공의 적>에서 설경구랑 같이 나왔던 모범형사지?”라며 “이제야 누군지 알 것 같다”고 무릎을 쳤다. <아 유 레디?>가 개봉할 즈음, “김정학이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에도 나온다며?”라고 사람들은 그에 대해 먼저 아는 척을 해왔다.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그렇게 김정학은 스멀스멀 우리 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는 다만 보이지 않았던 것일 뿐, 없었던 것이 아니다. 93년 스물두살 무렵, 김정학은 <모래시계>의 최민수의 어린 시절로 캐스팅돼 몇회 분량의 촬영을 마쳤다. 하지만 며칠 뒤 그 배역이 김정현으로 교체되고 자신은 정성모가 맡은 종도의 아역으로 바뀌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잠깐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끝나지 않은 게 오히려 잘된 일”이라며 자위하지만 그 이후 배우로서의 그의 인생이 그닥 순조롭게 풀려나간 것은 아니다. TV드라마의 조역과 단역으로 푸르른 20대를 보내며 이제 연기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 <연풍연가>에 출연중이던 장동건이었다. “제주도 내려와라, 어려운 거 아니다, 딱 2박3일만 찍자!” 김찬우의 소개로 가깝게 지내오던 장동건의 부름을 받고 내려간 제주도에서 그는 고소영을 짝사랑하는 교통경찰을 연기했고 <연풍연가>는 그에게 “지금껏 그렇게 즐겁게 찍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추억하는 기억의 일부가 되었다. 게다가 촬영장에서 만난 쿠앤필름 사람들은 “정학이는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를 해보라”고 권했고 그 인연은 결국 <텔미썸딩>으로 <번지점프를 하다>로 이어졌다.
“내가 주연을 할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본 적은 없다. 그보다는 늘 연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다.” 큰 영화의 주인공을 맡고 유독 시달렸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는 이미 품고 있었다. 타이의 오지마을에서 세트장으로, 절벽에 늪에 전쟁터에 온몸으로 반응해야 했던 <아 유 레디?>의 촬영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를 찍으며 힘들었던 것은 티낼 말도 자랑할 말도 아니”라고, “배우는 연기를 하면 그뿐이지만 안전을 위해 새벽부터 세팅하고 기다리는 몇십명의 스탭에 비하면 배우가 하는 고생은 고생도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몇번 넘기며 찍어낸 <아 유 레디?>는 “품지 않고 지를 수 있어 너무 시원했던 영화”였다. 그리고 긴 시간 몸 속에 쌓여 있던 많은 것들을 마음껏 분출하면서 그는 서서히 허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미쳐 보이는 연기가 아니라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면 나올 수밖에 없는 연기”를 보여줄 <해안선>은 그에게 영화적 허기를 채워주기 충분한 작품이었다. 장동건이 우발적으로 죽인 민간인의 애인, 미영을 강간하고 낙태시키는 과정 속에서 자신도 서서히 썩어들어가는 김 상병. <해안선>의 촬영을 앞두고 김기덕 감독은 2박3일간의 ‘지옥훈련’을 제안했다. 그러나 지옥훈련 일주일 전. 김정학은 119구급차에 몸을 실었다. 뇌수막염이었다. 고열과 고통 속에 꼬박 세운 4일. 하지만 “손가락만한 원경에라도 잡히기 위해 머리 빡빡 밀고 고생하는 동료배우들을 보나 동건이를 보나 빠질 수 없는 상황”임을 안 그는 스스로 ‘열외’를 거부했다. 물론 발성의 기본이 되는 ‘복식호흡’이 힘들 정도로 기력이 쇠하긴 했다. 게다가 최근 아버지가 암선고를 받아서 마음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인간사, 생로병사가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고, 머리 깎은 김에 절에나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든 나날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외줄타기 같은 인생, 되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와버렸고 떨어지면 천길 낭떠러지, 그저 천업이다 생각하고 잘 나아가보겠다”는 그는 <아메리칸 히스토리X>의 에드워드 노튼처럼 “밋밋해 보이는데 강한 에너지를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오만 가지로 찡그리고, 눈물에 콧물에 뒤범벅된 얼굴로 울고, 절규하는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그러기 위해선 “내일 첫배 타고” <해안선> 촬영장인 전북 부안군 위도로 떠날 거라 했다. 관객을 향해 손을 내민 지 어언 10년째. “친해지기까지 오래 걸리지만 한번 친해지면 오래 가는 편”이라는 그의 ‘우정관’처럼 김정학이라는 배우을 아는 데 걸린 시간을 보상해줄 긴 만남이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