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지 않은 사람만 나옵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제발 힘들었냐고 묻지 마시고, 재밌게 찍었으니까 재밌게 봐주세요.” <오아시스>의 첫 시사회가 있던 7월29일 대한극장, 설경구와 문소리는 각각 이렇게 인사를 띄웠다. <박하사탕> 이후 2년 반 만에 다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에서 만난 두 배우. 과연 전과 3범의 한심한 남자 홍종두와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 여자 한공주의 이야기인 <오아시스>는, 이른바 ‘보통 사람’의 편협한 눈에는 예쁘지도 않고, 힘겹고 안쓰러워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다. 하지만 가족들에게조차 버림받고 세상 모두로부터 소외당한 두 사람이 서로를 보듬어안을 때, 그들의 초라한 사랑은 사막 같은 삶에 숨통을 틔워주는 수원(水源)이 되어 흐른다. 사회 부적응자 같은 홍종두와 온몸이 뒤틀린 한공주를 가장 순수하고 사랑스럽기까지 한 연인들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설경구와 문소리가 함께 스튜디오를 찾은 것은 다음날 저녁. 99년 9월 <박하사탕>이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될 때 표지 촬영을 위해 다녀간 지 거의 3년 만이었다. 스틸 카메라 앞의 재회는 오랜만이지만, 두 사람은 <박하사탕>과 <오아시스> 사이에도 꾸준히 봐온, 그야말로 편안한 오빠, 동생지간. 사진기자의 주문대로 문소리의 뒤편에 섰던 설경구가 “어, 정말 골반이 좀 삐뚤어졌다”며 뒷모습을 살피자, “그렇지…(사람을) 썼으면 고쳐줘야 하는 것 아냐” 하고 문소리도 한마디 한다. 촬영 내내 몸을 비틀어 연기한 후유증이다. “미쳤어. 여배우가 장래를 생각해야지, 이런 영화를…” 하고 설경구가 다시 놀리듯 말하자, 영화를 시작하는 순간 이미 포기했다며 웃어넘기는 문소리. 6개월이란 짧지 않은 촬영기간 동안 동고동락한 두 사람에겐, 종두와 공주로 살기 위해 애쓴 기억들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너랑 하나도 맞는 게 없을 거다. 안 해도 되니까, 할지 말지 마지막으로 한번 더 생각해봐라.” 이창동 감독이 건네준 <오아시스>의 시나리오를 읽은 지난해 11월, 설경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강간미수, 음주운전 과실치사 등으로 단 별 세개 외에 가진 것이라곤 없는 전과 3범 홍종두.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찍을 무렵부터 익히 들어온 얘기였고, 이창동 감독이라면 무조건 믿고 하겠다던 그때의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또라이고, 한심한 놈이라는 건 대충 알겠는데, 행동선을 보면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는 데 있었다.
일단 “이창동 감독님이 썼으니까, 가만 놔두지 않고 어떻게든 해주겠지”란 믿음에서 홍종두가 되기로 했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헷갈렸다는 게 그의 솔직한 고백이다. <박하사탕>보다 5배는 어려웠다지만, 영하 10도의 겨울에 반팔 차림으로 출소한 종두가 혼자 두부를 베어먹는 순간부터 그는 설경구에게 딱 맞는 옷만 같다. 정말로 추워서 연신 콧물을 훔치는 동작에도, 겨울에도 맨발로 다닌다는 습관에도, 어리버리한 표정에도, 종두와 설경구는 한몸으로 어울려 있다. “캐릭터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편”이라는 그는, 문소리가 말도 못 붙일 정도로 무서웠다는 <박하사탕> 때와 달리 “만만하고 단순해지고자” 애썼을 뿐이라지만.
고민으로 따져보자면, 문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박하사탕>에서 하얗고 알싸한 박하사탕의 기억 같은 첫사랑 순임으로 영화에 데뷔한 지 2년. 그동안 설경구가 <단적비연수>와 <나도 아내가…> <공공의 적>으로 꾸준히 내달려왔다면, 문소리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연기는 괜찮다는 반응을 얻었지만, 막상 그를 찾아오는 시나리오는 많지 않았기 때문. 교육학과 연극반부터 <박하사탕>을 거치며 조심스럽게 키운 배우의 꿈이, 과연 자신의 길인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처녀 귀신으로 출연한 동현의 <외계의 제19호 계획>을 비롯해 <블랙컷> <봄산에> 등 6편의 단편영화를 하면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꼭 다시 좋은 작품을 수 있을 거라 힘을 북돋워주던 그 친구들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다림 끝에 다가온 <오아시스>였지만, 선뜻 결정을 내리기는 힘들었다.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을 연기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가능하다고 해도 그런 연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스럽기 짝이 없었기 때문. 일단 비디오 오디션을 해보자는 이창동 감독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10월부터 트레이너와 함께 연습을 시작했고, 사지가 뒤틀린 몸을 만들어가는 것부터 그 상태로 대화하는 것, 코엑스몰과 식당을 드나들며 사람들의 반응까지 카메라에 담았다. 막상 그 비디오 화면을 보여주려는 순간에는 엄두가 안 나 포기 선언을 했지만, “거만해서 못하는 거라고, 넌 신인이고, 세계적인 명연기를 바라는 것도 아닌데 욕심을 비우라고 말해준” 오지혜 선배의 따끔한 조언에 맘을 굳게 먹었다. “시작 자체가 제일 부담스러웠던” 때문인지, 촬영과정은 오히려 덜 힘들었다는 게 문소리의 말. 초반에는 촬영 전에 30분씩 몸을 풀었지만, 차츰 “변신 준비, (가짜)이빨 장착” 하면 바로 공주가 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스탭들이 문소리의 연기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움직일 수 있는 그를 두고 “공주 좀 치워줘” 하는 해프닝이 벌어질 정도였다.
한번에 오케이가 난 장면이라곤 손에 꼽을 정도인 현장을 떠올리다가, 두 배우는 이창동 감독에 이르러 갑자기 수다스러워진다. "웃는데 우는 듯, 재미있게 꺽꺽꺽 운다. 글로는 뭘 못 쓰겠어. 야비한 지문이야.” 종두가 어머니의 생신 잔치에 공주를 데려와서 ‘방울새와 참새’ 얘기를 늘어놓으며 웃다가 울다시피 하는 장면에 대해 설경구가 한마디 하자, 문소리도 덧붙인다. 거울에 반사된 햇빛이 나비처럼 보이는 판타지 장면에서 공주의 숨소리는 일명 “꿈꾸는 호흡”이고, 그외에도 호흡 종류가 수십 가지는 된다고. 열일곱 테이크 이상 갔던 강간미수 장면을 찍다가 거의 실신 지경에 이른 문소리에게 포도당 주사를 맞고 다음 장면을찍자고 했다거나, 종두가 두부를 먹을 때 휘날리는 비닐에 감정이 없다고 반쯤 잘라내게 한 얘기도 뒤를 잇는다. “감독님은 약은 사람이다. 절대 포기 안 한다. 그런다고 100이 나오나” 하며 설경구가 흉보듯 말하자, “섬세한 사람이다. 100은 안 나와도 96, 97까진 나온다”고 문소리가 슬쩍 바꿔 말한다. “미안해하면서도 끝까지 시키는” 감독을 원망한 적도 있겠지만, 남은 건 징글징글한 정과, 종두와 공주의 ‘오아시스’가 더 많은 관객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