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영화 속, `나` 대입하기,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2002-08-07

Leaving Las Vegas, 1995년감독 마이크 피기스출연 니콜라스 케이지가끔은, 음악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무얼 하고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 음악을 그만두면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 빵집 아저씨가 되었을까? 글쎄, 걸어보지 않은 길이라 이 상상은 해도 해도 끝이 없을 듯하다. 스케줄에 쫓기고, 몸이 아주 피곤할 때,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에 있어서, 나는 종종 영화보기를 선택한다. 분명 아무 것도 안 하고 잠을 잔다거나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는 게 피로를 푸는 데 도움이 더 되겠지만, 영화를 보며 눈과 귀를 긴장시키다보면 왠지 모르게 에너지가 샘솟는 걸 느낀다.

살다보면 수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때 내가 그 누군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하다 못해 아까 짬뽕이 아니라 자장면을 먹었으면 지금의 나에게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런 종류의 얘기가 삶에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내게 있을 수 있는 모든 상황과 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내 자신에 대한 탐구의 열망이 나로 하여금 영화 속으로 늘 빠져들게 한다.

영화를 보면서 나의 다른 인생을 상상해 보는 것, 영화 속 등장인물의 그때그때 삶을 모방해보는 것은 나에게 특별히 더 흥미로운 일이다. 2년 전 가수 박정현의 녹음을 위해 LA에 잠시 머물렀을 때다. 일행 중 누군가가 잠시 녹음을 쉬는 며칠 동안 라스베이거스에 다녀오자는 말을 했고, 거기에 나는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며 맞장구를 쳤던 기억이 난다. 나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가 너무 좋아서 여섯번이나 봤다. 그런 내가 라스베이거스에 간다는 말에 흥분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직도 그 영화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술 냄새, 절망적이고 나른하고 뭔가 도피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우울함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하여튼 난 거기에 가서 최대한 벤을 느껴보고 싶었고,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6시간쯤 걸렸던 것 같다- 영화의 장면장면을 떠올리며, 서울이 아닌 진짜 라스베이거스에서 벤이 돼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차이가 있는 법. 막상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서는, 고작 몇잔에 취해(나는 술이 아주 약하다) 슬롯머신에 기대어 자버렸고, 그걸로 만족해야만 했다. 술을 못하는 알코올 중독자라니…. 하지만 라스베이거스에서 취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겐 그럭저럭 즐거운 경험이었다.

사실 이런 식의 경험은 어릴 적부터 종종 있었다. 자주색 보자기를 목에 묶고 하는 슈퍼맨 놀이는 남자라면 누구나 해봤을 법한 거라서 빼놓고라도, <구니스>를 보고 하수도에 들어갔다가 나오느라 고생한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이런 영화 흉내내기 때문인지 몰라도 나에겐 재미없게 본 영화가 거의 없을 정도다. 스토리가 별로인 영화일지라도, 영화 속의 캐릭터에만 몰입해서 감상한다든지 특수효과에 나를 대입시키며 끊임없이 상상을 한다든지 하는 식의 영화감상을 하는 편이니까 말이다. 최근에, 솔직히 스토리 자체는 뻔했다고 생각되는 <스파이더 맨>을 보고 나서도, 내가 정말 재미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집에 가는 길 내내 머릿속으로 차창 밖의 건물들 사이로 거미줄을 널어가며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를 상상하는 게 너무 신이 났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영화가 재미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중 최고로 꼽을 만한 영화는 바로 <인생은 아름다워>이다. 영화에 몰입하면 할수록 제목 그대로 인생이 아름다워지는 영화였다고 해야 할까? 지옥 같은 현실을 즐거운 놀이처럼 만드는 것. 그 영화에서는 유머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다. 나에게는 조금 부족한 재능이라서 더 그런 건지는 몰라도, 유머감각, 그건 내가 늘 꿈꾸는 현명함 중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에 로베르토 베니니가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 아들 앞에서 군인처럼 과장된 행동을 했던 부분에선- 아.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오려 한다- 우스꽝스럽게도 웃는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 그건 아마 죽을 때까지 고민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볼 때 스스로를 영화 속에 대입시키며 상상해 보고, 그러다보면 예전엔 미처 몰랐던 자기 자신을 하나하나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찾은 또 다른 나 자신이 앞으로의 나 자신을 더욱 현명하게 만들 거라는 것을 나는 믿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언제나 나에게 익숙하되 잊기 쉬운 것들 혹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에 대해 말해주는 고마운 친구 같은 존재다. 살면서 절대 멈추지 말아야 할 것, 그건 끊임없이 현명해지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현명해지기를 나는 기대한다.

글: 하림(河琳)/ 가수·<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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