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선한 미소를 띤 살인마, <인썸니아>의 로빈 윌리엄스
2002-08-14
글 : 박은영

로빈의 난폭하고 광기어린 한해! 미국의 한 언론은 최근 로빈 윌리엄스의 행보를 이렇게 설명한다. 하긴, 화살코에 주걱턱, 선한 눈매와 친근한 미소로, 낭만과 이상과 사랑을 이야기하던 로빈 윌리엄스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 올 초 인디영화 <스토커>에 그림처럼 행복한 한 가족에 집착하는 이상성격 사진사로 출연하더니, 가족영화 <스무치>에서는 일자리를 코뿔소 코스튬 청년에게 빼앗기고 복수하는 전직 TV쇼 호스트를 연기했다. <인썸니아>에서는 한술 더 떠, 베테랑 형사를 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연쇄살인범이 됐다. 영원한 ‘해피 보이’인 줄 알았던, 그 로빈 윌리엄스가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천사’ 또는 ‘성인’의 이미지를 지닌 로빈 윌리엄스의 악역 연기에 소름 돋는 리얼리티가 있다. <인썸니아>에서 그는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미스터리 소설 작가를 연기하며, 주변 캐릭터는 물론 관객까지도 그의 비행을 근사하고 정당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사악하고 교활하지만 시종 냉정하고 차분한 그의 분신은 죄책감과 불면증으로 머리와 가슴이 마비된 알 파치노의 베테랑 형사보다 한수 위다. 그가 고요한 눈빛과 차분한 목소리로 전하는 악의 복음은 강렬하고 치명적이다. 찰리 맨슨 등 희대의 살인마들을 두루 연구하며, 그들의 냉정과 평상심이 바로 리얼리티고 공포임을 간파한 덕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시끌벅적한 재담과 활기, 다정하고 부드러운 ‘나이스 젠틀맨’의 이미지는 로빈 윌리엄스의 출세작인 <굿모닝 베트남>부터 최근작인 <제이콥의 거짓말>까지 죽 이어져 내려왔으니까.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여장 가정부, <알라딘>의 램프 요정 지니, <버드케이지>의 동성애자, <플러버>의 괴짜 박사 등 그의 분신들은 대개 ‘아드레날린 과잉’이다. ‘현재를 즐기라’고 가르치던 키팅 선생의 <죽은 시인의 사회>, 방황하는 천재에게 인생의 길잡이 역할을 해준 <굿 윌 헌팅>, 인간과 사랑에 빠진 감성적인 로봇으로 출연한 <바이센티니얼맨>이 약간의 어둠을 품은 역할이었을 뿐. <엔터테인먼트 위클리>가 로빈 윌리엄스를 “살아 있는 가장 재밌는 사람”으로 첫손에 꼽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 로빈 윌리엄스가 갑작스레 달라진 건 왜일까. <패치 아담스>와 <바이센티니얼맨>에서 극에 달한 평단의 비난 여론 때문이었을까. 당시 영화의 함량에 대한 불만이 로빈 윌리엄스의 안목과 매너리즘에 대한 힐난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지난 선택이 틀렸다거나, 그 때문에 변화의 계기를 찾은 건 아니라고 말한다. “난 후회하거나 사과할 맘이 조금도 없다. 영화는 영화일 뿐 그 이상은 아니지 않은가.” 내리 세편의 영화에서 악역을 맡은 것도, 당분간 악역에 집중하겠다는 ‘선언’의 뜻은 아니다. “좀 어둡고 으스스한 역할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매니저가 세편이나 들고 와서, 그렇게 됐다”는 다소 맥빠지는 우연. 그동안 잡아보려 했던 ‘다른’ 기회라는 것이, 이렇게 늦게 한꺼번에 밀려온 것이다.

로빈 윌리엄스는 지금 할리우드가 아닌 브로드웨이에서 또 다른 일을 꾸미고 있다. <로빈 윌리엄스: 브로드웨이 라이브>라는 제목으로 스탠드업 코미디쇼를 공연하고 있다. 그 많은 영화, 그 많은 캐릭터로도 미처 풀어내지 못한, 그 어떤 ‘표현’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던 모양이다. “배우로서 많은 걸 이뤘다고 생각될 때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다른 길을 택한다고 해서, 그동안 이룬 것들이 한순간에 변하거나 사라지는 일 따윈 없다.” 50의 나이, 40편의 필모그래피를 쌓아올린 이 배우는, 그렇게 그 자신을 위한, 그 자신을 향한 도전과 반란을 꿈꾸고 있다.

사진 SYG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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