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를 돌아보자면, <하얀 면사포>에서 마틸드, 그러니까 바네사 파라디의 죽음이 (정신적인) 나의 10대를 끝냈고, <나쁜 피>에서 오토바이 소녀, 줄리 델피의 눈물이 (역시 정신적인) 나의 20대를 시작하게 했다. 하지만 그런 취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996년 작고한 <마스카라>의 이훈 감독을 만나면서, 함께 작업하면서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헐렁한 영화들’에 대한 애정이 생겨버린 것이다. 예전엔 느끼하게도 우아를 떨던 내 취향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하다가 결국 10대 시절부터 AFKN을 통해 그렇게도 지겹게 일년에 한 번씩 보던 <록키 호러 픽처 쇼>가 개봉한다기에 열댓번도 더 본 그 영화가 상영되던 대학로의 어느 극장에서 벌거벗고 춤을 추기도 했다. DVD 시대가 되면서 저주조차 받을 겨를이 없었던 말 그대로 ‘쓰레기’ 영화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소니 치바의 권격 액션물, 머리를 한껏 부풀린 글래머 아프리카인들이 소울 뮤직에 맞춰 하이힐을 신은 발을 허공에 휘둘러대는 블랙플로이테이션 필름들, 뱀과 괴수들이 난무하는 1950년대 B급 영화들… 앤드류 새리스가 분류한 ‘쓰레기통까지 뒤져보는 영화광’이 된 것이다. 아니, 오히려 쓰레기통만 골라서 뒤져보는 이상한 인간이 된 모양이다. 세상엔 너무나 좋은 영화들이 많다. 좋은 영화를 골라내고, 소개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나는 <피셔 킹>에서 로빈 윌리엄즈가 ‘쓰레기에서도 가끔 뭔가 괜찮은 것이 발견된다’고 말한 것 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보석을 찾아내려고 하는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고 ‘그저 쓸 만한 것’을 골라내는데 집착했다. 하지만 내 인생의 영화는 쓰레기장에 안치되어 있지 않았다.
<스페이스 카우보이>는 개봉 이전, IMDB를 뒤지다 우연히 찾아낸 영화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근작, 노인들이 우주공간으로 날아가는 이야기.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면 개인적으로 로버트 앨트먼보다 열배쯤 더 좋아하는, 미국 최고의 영화감독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니던가. 그동안 이스트우드가 집중했던 ‘나이를 먹어가는 것의 의미’에 합당한 영화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개봉 날짜는 금새 다가왔고, 자연스럽게 시사회장을 찾았다. 고장난 위성을 고치러 직접 대기권 밖으로 나가겠다는 코빈에게 악덕 관료 거슨은 “너는 너무 늙어서 우주에 못가”라고 말한다. 그러자 코빈의 대답. “시간은 지나가고, 나는 점점 더 늙어간다구.” 쿨한 대사 한마디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왔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 얼마나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던가. 나는 우주공간에 가본 적도, 가볼 기회도 없었다. 존재는 하지만 알 수 없는 그 곳. 그런 느낌은 노인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부터 달을 정복하고 싶어했던, 아니 단지 그 곳에 가는 것이 꿈이었던 폭주노인 호크의 캐릭터는 남자의 로망인 동시에 노인의 로망이었다. 그 꿈이 이루어지는 마지막 장면, 프랭크 시나트라의 이 흐르며 달의 지표를 훑어나가는 카메라웍은 적당한 온도의 눈물까지 선사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용서받지 못한 자>로부터 <트루 크라임>까지, 꾸준히 노년의 슬픔을 다뤘다. 하지만 모두 어느 정도의 패배주의를 담고 있었다면, <스페이스 카우보이>는 노년의 애수를 ‘새로운 도전’으로 승화시킨 영화였다. 조금도 궁상맞거나 바른생활 캠페인적이지 않고, 동정을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아직 젊지만, 이제는 반환점을 돈 것 같다. 지표에 도달했으니, 이제 우주를 향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