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이 하나라도, 배는 산으로 간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 얘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한 사공이 배를 산으로 끌고 갔다는, 진담. 미치광이라 손가락질 받아도, 모두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한이 있어도 꿈의 닻을 내리지 않았던 집념의 사공에 대한 이야기다. 페루의 밀림에 오페라 하우스를 짓겠다는 일념으로 배를 끌고 산을 넘은 사나이 피츠카랄도, 세상의 끝 아마존과 황금향 엘도라도의 정복을 꿈꾸던 스페인 장군 아귀레. 불가능과 한계를 모르는 이 지독한 광기의 몽상가들 뒤에는, 욕망과 혼돈으로 소용돌이치는 푸른 눈동자의 남자가 있었다. 지금은 나스타샤 킨스키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진 배우, 클라우스 킨스키다.
킨스키는 세상을 떠난 1991년까지 150여편의 영화에 출연한 독일 배우. 니콜라우스 군터 나크진스키란 본명을 지닌 그는, 1926년 당시 독일령 폴란드에서 태어나 베를린으로 건너왔다.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도둑질을 할 만큼 궁핍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에 징집됐던 그의 성장기는 불우하기 짝이 없다. 금세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의 포로수용소에서 지냈지만, 독일로 돌아왔을 때는 가족 대부분이 죽고 사라진 뒤였다. 갈 곳 없던 그는 연극무대에 올랐고, 터뜨릴 곳 없는 울분의 출구와 같은 그곳에서 광포한 카리스마와 그만큼 사나운 성격으로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훗날 4번의 결혼에서 얻은 두딸 나스타샤와 폴라의 이름을 <죄와 벌>에서 따올 만큼 좋아했다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랭보, 오스카 와일드 등이 그의 레퍼토리였다.
1948년 <모리투리>를 시작으로 연간 많게는 10여편에 이르는 영화를 찍었지만, 기억될 만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영화는 돈을 의미하고, 돈은 고역에서 벗어나는 수단”이었기 때문. 튀어나올 듯 부리부리한 눈, 곧잘 삐뚤게 다문 입매에 냉소를 흘리던 그의 이미지는 악역으로 먼저 빛을 봤다. 전쟁영화와 첩보물부터 싸구려 호러, SF, 코미디 등에 가리지 않고 출연하면서, <흑백살인사건> 등 60년대에 독일에서 인기리에 제작됐던 영국 작가 에드거 월러스 원작의 미스터리 및 범죄영화의 조연으로 시선을 모았다. <닥터 지바고>의 냉소적인 허무주의자, 반 클리프에게 고초를 겪던 <황야의 무법자>의 악당 정도가 비교적 알려진 작품들. 72년작 <아귀레, 신의 분노>를 필두로 5편의 영화에서 동고동락한 베르너 헤어초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신들린 듯한 그의 연기도 스크린에 제대로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헤어초크와 킨스키, 서로에게 최상의 악연(?)이었다 할 만한 두 사람의 만남은, 50년대 뮌헨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킨스키에 관한 다큐멘터리 <나의 친애하는 적>의 도입부에서 헤어초크는 어린 시절 우연히 옆방에 살았던 그를, 화가 나면 제 분에 못 이겨 48시간 가까이 집안을 때려부수던 모습으로 기억한다. 가파른 삶에서 응축된 것이든 천부적인 기질이든, 분노와 독선은 킨스키의 동력원이었다. 스탭 하나가 맘에 안 든다며 자르지 않으면 그만 두겠다고 발광하는 킨스키에게 헤어초크가 총으로 그를 쏘고 자신도 죽겠다고 했다는 <아귀레…>의 촬영 일화는 유명하다. 오죽하면 <위대한 피츠카랄도>를 찍을 때는 킨스키의 난동을 보다 못한 원주민이 헤어초크에게 그를 조용히 없애주겠다고 제안했을까.
“난 그 살인자 헤어초크를 경멸한다.(중략)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독사에게 물려 뇌가 터져버렸으면!(중략) 다 쓸모없다. 그가 가장 끔찍하게 죽기를 바랄수록, 그리고 세상에 둘도 없는 인간 쓰레기 취급을 할수록 더더욱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헤어초크의 면전에서는 물론 인터뷰마다 그에 대한 욕설과 악담을 퍼부었다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광기를 이해하는 ‘친애하는 적’이었음에 분명하다. 시체가 뒹구는 뗏목에서 엘도라도와 아마존을 정복하고 자신의 제국을 세우겠다는 반역의 과대망상에 젖는 아귀레나 시시포스처럼 포기를 모르던 피츠카랄도, 스스로 파괴될 만큼 거대한 몽상에 사로잡힌 이들은 두 사람 최고의 작업이었다. <노스페라투>에서 드라큘라 백작의 기괴한 음산함, <보이체크>에서 가난하고 무기력한 자신을 배신한 아내에게 칼을 꽂는 늙은 군인의 텅 빈 절망의 눈, <코브라 베르데>에서 노예 무역을 위해 파견된 서아프리카 해안에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고도 유일한 백인이란 고립감을 가누지 못하던 노예상의 허망한 야욕까지, 헤어초크 영화에서 킨스키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시적인 에너지를 마음껏 쏟아냈다.
<코브라 베르데>를 끝으로 헤어초크와 갈라선 킨스키는, 주연 겸 첫 연출을 맡은 <파가니니>를 마지막 영화로 남겼다. 당대에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뛰어난 재능과 수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얻었지만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천재 음악가의 삶에 자신을 겹쳐봤던 걸까. “저널리스트들, 작가들, 영화의 변태들: 이 욕심쟁이들은 나를 먹이로 삼으려고 한다”며 영화계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과 복잡한 여성 편력으로 구설수에 오르내린 그는 파가니니와 닮은 듯도 하다. 캘리포니아의 라구니타스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기까지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향해 으르렁거렸던 킨스키.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난봉꾼, 혹은 끝내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와 같던 그의 강렬한 체취는, 불가해한 인간의 욕망과 광기어린 집착으로 파고든 헤어초크의 영화와 함께 필름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