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윅>이라는 영화에 대한 소문을 접했을 때 나의 기대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시큰둥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드랙퀸’이라든가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들이 이제는 주류 문화산업에 의해 만만하게 착취되어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라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대해 누가 평을 쓸지도 이미 헤아릴 수 있었다. 그건 이 방면의 전문가렸다. 그 전문가가 ‘포스트 스톤월 시기의 퀴어 폴리틱스’에 대해 설파하는 글이 어딘가에 실릴 것이고, 나는 그저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그 글을 발견하고는 ‘복습’하는 마음으로 한번 죽 읽어내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영화를 직접 보기 전에 이런저런 말을 전해 들으면서 그 영화에 대해 ‘마치 진짜로 본 것 같은 환상’에 빠지는 일 말이다. 이번이 딱 그런 경우에 속했다.
이건 너무 냉소적인 반응이다. 하긴 누가 나더러 ‘당신 글은 허구한날 덜 떨어진 록과 인디 타령이냐’라고 말한다면 나 역시 과묵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까놓고 말해서 이런 영화 하나 더 개봉되면 뭐 하나. 한국인들의 트랜스젠더에 대한 일반적 관념은 향후 5년간 하리수의 성형발과 꽃단장을 넘어서기 힘들지 않을까. 그건 최근 방영되는 한 TV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인디 밴드의 멤버로 나온다고 해서 인디 록에 대한 세인의 시선이 달라지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만 더. 음악이 많이 나오는 영화라는 말을 전해 들은 것도 그리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시사회를 다녀온 후배에게 “어떤 음악이냐?”라고 물었더니 이기 팝(Iggy Pop),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루 리드(Lou Reed) 스타일의 음악이라는 응답이 왔다. 그 말을 들은 즉시 “1970년대 글램 록의 흥망성쇠(Rise and Fall!)의 야사(野史)를 펼쳐 보였던 <벨벳 골드마인>이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라는 질문을 거둘 수 없었다. 도착적 섹슈얼리티를 담은 음악도 이제 그렇고 그런 식으로 소비되는 패턴이 정착했다는 건방진 판단까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 대한 에세이의 필자로 내가 ‘당첨’되고 말았고, 요리조리 피해 보았지만 급기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그 주된 이유는 연전에 <벨벳 골드마인>에 대한 에세이를 내가 썼기 때문이다. 그 죄 아닌 죄로 다시 한번 아마추어가 하는 영화평론(이랄 건 없고 잡문)을 하게 되었다. 독자들의 깊은 아량을…). 불행히도 영화를 보고 난 뒤 나의 곤혹스러움은 더욱 커져버렸다. 한술 더 떠서 영화 텍스트와 무관한 상상까지 펼치게 되어버렸다. 이런….
영화가 주는 느낌은 뜻밖에 ‘짠한’ 것이었다. 드랙퀸이 나온다고 해서 아찔한 미모를 소유한 꽃미남이 등장할 줄로만 알았는데 주인공은 마치 ‘노창’(老娼)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헤드윅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토미도 꽃미남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좀 모자라 보였고, 게다가 그의 섹슈얼리티는 영화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헤드윅의 중성의 아줌마 같은 섹슈얼리티를 느끼면서 나는 트랜스젠더가 ‘예쁜 여자’가 되고 싶은 욕망 이상의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이제까지 잘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에 심히 부끄러워해야 했다. 또한 주인공 헤드윅의 밴드의 기타 연주자로 등장하는 남자의 실제 성별이 여성이라는 정보는 감독의 구도가 꽤 치밀하고 복선이 많다는 징후였다.
게다가 영화의 진행은 ‘성적 소수자’의 영화란 게 “우리끼리도 행복하게 잘산다”라는 천사표(標) 메시지 아니면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과 투쟁하여 권리를 찾는다”는 투사표 메시지 중 둘 중 하나라는 나의 편견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물론 ‘사랑’이나 ‘행복’이라는 단어에 대해 닭살이 돋는 나로서는 <사랑의 기원>(The Origin of Love)(사운드트랙 수록곡 중 하나다)에 대한 추구가 진부하게 들렸다. 그렇지만 사랑과 행복을 갈구하는 방식은 진부하지 않았다. 영화 마지막에서 브래지어 속에 넣어두었던 토마토를 터뜨리는 제의(祭儀)를 통해 ‘나는 남자이면서도 여자’ 혹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무엇’이라는 식으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장면은 트랜스젠더라는 단어의 접두어 ‘트랜스’를 잘 정의해 주었다(나에게 트랜스라는 단어의 의미는 변압기를 지칭하는 ‘도란스’의 기능을 연상할 때 가장 잘 와 닿는다). 그건 ‘모든 것은 부유하는 기호일 뿐’이라는 <벨벳 골드마인>의 허무한 결론보다는 덜 모호했다.
퀴어 혹은 변방의 로큰롤 드림
그런데 이런 ‘성정치적 해석’으로 충분할까. 나는 이 영화를 평한 많은 글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몇몇 등장인물들이 ‘민족적 소수자’(ethnic minority)라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 점이 다소 이상했다. 주인공 헤드윅이 동독 출신이라는 사실은 하나의 배경 이상으로는 언급되지 않는다. 앵그리 인치의 다른 멤버들 중에도 동구권(이른바 ‘이스턴 블록’) 출신이 등장하고, 헤드윅이 처음 밴드를 시작할 때 한국계 미국인들이 잠깐 등장한다는 사실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런 것들이 영화의 주요한 모티브는 아닐 수도 있다. 민족적 소수자라는 정체성은 그저 헤드윅이 성적 소수자임을 강조하는 양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앞서 내가 ‘영화 텍스트와 무관한 상상’이란 바로 이 점을 말한다. 그렇지만 이런 불필요한 상상이 허용된다면 이 영화는 ‘퀴어영화’의 관점 이외에 또 하나의 관점에서 조망될 수 있다. 다름 아니라 이 영화를 ‘로큰롤 드림’을 다룬 텍스트, 그것도 록음악의 제국으로부터 고립된 지역 출신의 로큰롤 드림을 다룬 텍스트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케이스에 속하는 영화는 공교롭게도 같은 해인 1989년에 나온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와 마이클 앱티드의 <더 롱 웨이 홈>(The Long Way Home)이 대표적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해도 되겠지만, 후자의 경우 ‘러시안 록의 지존인 보리스 그레벤시코프가 미국과 영국에 가서 음반을 레코딩한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라는 부연이 필요할 것이다(참고로 마이클 앱티드는 <넬>의 감독이고, 보리스 그레벤시코프는 빅토르 최를 ‘키워준’ 존재다. 한편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스는 ‘서방세계’ 출신이지만, 밴드의 이름에 있는 ‘레닌그라드’라는 단어는 서방세계와 단절된 지역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두 영화는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레닌그라드…>가 코미디이고 픽션인 반면, <더 롱…>은 실제 상황을 담담하게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로큰롤 드림이 좌절되는 이유와 과정에 대한 묘사 역시 천차만별이고 주인공들이 좌절한 뒤 발길을 돌리는 곳도 상이하다. 그렇지만 록문화의 변방의 음악인들의 로큰롤 드림이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그린 점은 공통적이다. 영미의 록음악은 변방의 록 음악인에게 유년 시절부터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그가 막상 록음악의 ‘성지’에서 경험하는 일은 그들의 꿈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스는 미국 시장에서 아무런 기회를 잡지 못한 채 멕시코로 건너가 밴드 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나오고, 보리스 그레벤시코프는 음반이 상업적으로 실패한 뒤 러시아로 돌아갔지만 동료들로부터 배신이라는 말을 듣고 그의 밴드는 해체된다. 전자는 희극적이고 후자는 비극적이지만 공통분모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조금 ‘오버’해서 말한다면, 10대 시절 “롤링스톤스나 퀸 정도는 되어야지”라고 다짐했던 한국 ‘그룹 사운드’의 운명을 그린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결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조용히 손잡은 두개의 정체성
그런데 이렇게 ‘좌절의 상황을 리얼하게 묘사한 영화’를 넘어서는 길은 없을까. 이 점에서도 <헤드윅>은 하나의 출구를 제시해 준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날 태어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 남자에게 차였다’는 헤드윅의 ‘팔자’는 동독이나 동구권 출신의 혼란되고 희망없는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에게 로큰롤 드림은 미군 병사가 던져주는 미제 젤리의 맛처럼 삼삼한 것이고, ‘야메’로 수술을 해서 성별을 전환해서라도 추구해야 할 꿈이다. 그렇다면 동구권 출신이라는 소수성은 트랜스젠더라는 성적 소수성과 처음부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게 너무나도 유기적으로 엮여져 있기 때문에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혹시 영화의 말미에서 헤드윅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장면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도 재정의하는 장면으로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불행히도 영화를 볼 때는 ‘동구권 출신의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압도했고, 감독 역시 그 이상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트랜스젠더가 문화적 옵션이라면 트랜스에스니시티(transethnicity: 죄송! 한국어 표현을 찾기 정말 힘듭니다)라는 문화적 옵션도 가능한 것 아닐까. 별말이 아니라 국적과 민족을 ‘문화적으로’ 왔다갔다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이다. 하지만 상상은 이쯤에서 그치기로 하자.
하지만 마지막 질문은 남는다. 그건 영화에 잠깐 등장했던 한국계 여성들에 관한 것이다. ‘기지촌’ 부근에서 만난 여성들이다. 미제 젤리를 먹고 싶어했던 헤드윅의 욕망은 한국인들에게는 징그러울 정도로 친숙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보편적인 한국인이 이 영화에서 표상되는 방식은 성적·민족적 주변자인 헤드윅보다도 더 주변적이다. 미국에 동독 출신보다 한국 출신이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그 장면에서 헤드윅이 한국계 멤버들과 함께 연주한 음악이 제니 최(Jenny Choi)의 노래와 비슷하다고 느낀 것은 나의 환청이었을까. 아니면 한 장면을 침소봉대하여 한국계의 로큰롤 드림을 다룬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엽기적인 것이었을까. 어쨌거나 ‘야, 한국 애들 나왔다. 재밌다’라고 시시덕거리는 수준은 넘어서야 할 텐데….
* 제니 최(1977년생)는 시카고에서 서드 시프트(The Third Shift)라는 인디밴드를 이끌고 활동하는 한국계 여성 음악인이다. http://www.weiv.co.kr/view_detail.asp?code=interview&num=1639에 오시면 그녀와의 인터뷰와 음악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신호미/ 문화비평가 http://homey.w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