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벗으라구요?” 바람이 몹시 불던 날, 고압 전류에 감전된 여인. 청년은 그저 코트를 벗으라고 말한 것뿐인데, 그에게 매혹당한 여인은 그렇게 속내를 들키고는 귓볼을 붉히고 만다. 자상한 남편과 귀여운 아들을 둔 결혼 11년차 주부가 ‘감각의 제국’에 발을 들이는 순간이다. 서른일곱, 다이앤 레인이 <언페이스풀>의 그 ‘위기의 여자’로 돌아왔다. 화사한 청춘이 지나간 자리에 지난 세월의 무게가 쌓이긴 했지만, 여전히 섹시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니, ‘여전하다’는 수식은 어울리지 않는다. <커튼 클럽> 이후 18년 만에 다이앤 레인과 재회한 리처드 기어가 “그때 다이앤은 눈부신 아이였지만, 지금은 눈부신 여인이다”라고 증언하고 있으니까.
그 18년 동안 정말 많은 게 달라졌다. 스무살도 채 되기 전에 백만장자였던 아이돌 스타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말하는 겸허한 배우가 됐고, 맷 딜런과 존 본 조비 등 당대의 터프가이들과 염문을 뿌리던 스캔들메이커는 크리스토퍼 램버트와의 사이에 아홉살배기 딸을 둔 싱글 맘이 됐다. 누구나 한번쯤 품어봄직한 의문. 다이앤 레인은 그때 그 시절이 그립지 않을까. “나는 일하지 않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좋지만, 빛과 그늘을 품은 스타덤이 아쉽진 않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여전히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울 뿐이다.” 잊어버리기 쉬운, 그러나 그래선 안 될 사실 한 가지. 다이앤 레인이 20년 넘는 세월을 할리우드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생존’이다.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다이앤 레인은 여전히 신비롭고 사랑스러운 소녀다. 동네 양아치들의 패싸움에 빌미가 되는 <아웃사이더>의 빨강 머리 소녀이고, 폭주와 방화의 아수라장 속에서 옛사랑의 비호를 받는 <스트리트 오브 파이어>의 로커이고,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차지하고픈 <커튼 클럽>의 보스의 여자다. 다이앤 레인의 페르소나는 자신이 원하는 걸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자기애가 유난히 강했고, 사랑이 장애가 될 때는 과감히 버릴 줄도 알았다. 그렇듯 쉽게 범접할 수도 떨쳐낼 수 없는 거대한 매혹으로, 다이앤 레인은 80년대의 청춘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커튼 클럽>으로 실패의 쓴맛을 본 다이앤 레인은 “배우로서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그때 나이 열아홉이었다.
그건 일종의 반항이고 도피였다. 연기 코치인 아버지와 <플레이보이>의 간판 모델인 어머니 사이에서, 다이앤 레인은 배우의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부여받았다. 여섯살 나이에 연극무대에 올랐고, 열세살에 찍은 영화 데뷔작 <리틀 로맨스>로 ‘제2의 그레이스 켈리’라는 찬사를 들으며 <타임>의 표지를 장식했다. 너무 비범한 유년기였다. 어린 다이앤은 “내가 예쁘지 않거나 인기가 없어도 빼앗기지 않을 일”을 갈망했고, 결국 자연인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그 3년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다시 돌아온 다이앤 레인에게 할리우드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외로운 비둘기>라는 TV시리즈로 에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지만, <나이트 게임> <채플린> <나이트 무브> 등 그만그만한 영화들이 손짓할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90년대 중반 이후로 <저지 드레드> <머더 1600> <퍼펙트 스톰> 같은 블록버스터부터 <워크 온 더 문> 같은 인디영화까지, 다이앤 레인의 필모그래피가 갈지자를 그리며 ‘끊임없이’ 이어져오고 있다는 사실. “1천 파운드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데도, 내게 5파운드만이 주어진다는 것은 남들이 꼭 그만큼만 나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제 조금씩 그 무게가 불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지난 2월에 운명을 달리한 다이앤 레인의 아버지는 <언페이스풀>이 다이앤 레인의 연기인생을 바꿔놓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 아버지가 죽으면 연기를 그만두리라는 판타지가 있었다고. 나를 배우로 만든 사람이 바로 아버지니까.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넌 바로 나의 커리어, 그 전부라고. 난 아버지의 메이저 프로젝트다. 인정한다.” 아버지는 떠나고, 프로젝트는 남았다. 다이앤 레인은 지금 그 ‘미완의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애타게 다음 작품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