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언페이스풀>의 그남자 올리비에 마르티네즈
2002-09-04
글 : 최수임
그 남자 낯설다,매혹적이다

유독 ‘향’이 강한 배우가 있다. 은은히 다른 배우들의 개성에 녹아드는 대신, 의도하건 안 하건 영화 전체에 자신의 개성을 퍼뜨리는. 그로 인해 영화의 맛이 달라지는. <언페이스풀>에서 다이앤 레인을 몸달게 하는 젊은 남자 폴 마텔 역의 올리비에 마르티네즈가 그런 배우다. 어깨에 닿을락말락 기른 갈색 머리, 푸른 눈의 서양인들이 동경한다는 ‘아몬드색’의 눈동자, 남국의 관능이 묻어나는 모델 같은 몸매, 그리고 불어 악센트가 실린 희한한 영어발음. 스페인계가 섞인 프랑스인인 그는 <언페이스풀>에서 리처드 기어, 다이앤 레인 등 다른 스탠더드한 미국 배우들 속에서 유난히 튀는, 이국적인 존재다. 올리비에 마르티네즈로 인해, 뉴욕의 서적상 폴 마텔은 낯선 이방인의 아우라를 갖는다.

올리비에 마르티네즈는, 북아프리카의 프로복싱 챔피언이었던 스페인계 아버지와 프랑스 어머니 사이에 나서 파리 외곽에서 성장했다. 그의 부계는 ‘더이상 하지 못할 때까지’ 권투를 하는 인생을 사는 남자들의 역사였고, 그 역시 권투를 했다. 그러나 “젊어서 몇년 반짝하고 늙어서 병든 몸을 안고 살기 싫다”며 링을 내려왔고, 전기공이 돼볼까 하다가 친구의 권유로 프랑스 유수의 연기학교 시험에 응시, 합격하면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아들이 나면 죄다 복서로 살아가던 집안에서 그의 ‘배우선언’은 충격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생계를 위해 운동화를 팔던 무렵, 마르티네즈는 이브 몽탕의 마지막 출연작인 장 자크 베네의 <IP5>에 캐스팅됐고 이 첫 영화(IMDB에는 그의 데뷔작을 <Plein Fer>로 적고 있으나, 마르티네즈는 무슨 이유에선지 모든 인터뷰에서 를 첫 영화로 말한다)로 세자르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다음 영화인 베르트랑 블리에의 <하나, 둘, 셋, 태양>으로 세자르 신인상을 받은 뒤, 세 번째 영화인 <지붕 위의 기병>에서 첫 주연 연기를 해 인기를 끌며 그의 경력은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프랑스의 브래드 피트’로 자신이 홍보된 이 영화 <지붕 위의 기병>에서 마르티네즈는 콜레라가 창궐한 나폴레옹 시대 유럽의 기병을 연기했는데, 상대역 줄리엣 비노쉬와는 실제로 사랑에 빠져 한동안 동거를 하기도 했다(비노쉬와 헤어진 뒤 마르티네즈는 미라 소비노와 사귀었다).

처음부터 그의 필모그래피는 유럽 유수의 감독들을 두루 거쳤다. 장 자크 베넥스의 <IP5>를 비롯해 베르트랑 블리에 감독의 <내 안의 남자>, 비가스 루나 감독의 <타이타닉의 하녀>까지. 사람들은 조금씩 그에게 “언제 할리우드에 가냐?”고 물었지만, 한동안 그는 영어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영어도 못하는데, 뭘” 하며 프랑스에 머물렀다. 그는 스스로를 ‘진정한 파리지앵’라고 칭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고귀함과 품위가 결여돼 있다”고 싫어한다. 조금만 공백이 있어도 “왜 쉬었냐”고 묻는 미국 기자에게 “정원에다 부추와 당근을 키웠어요. 그리고 불(boules: 론 볼링 비슷한 프랑스의 경기) 게임을 했죠. 그러니까 난 완전히 비(非)미국인이에요. 난 일을 안 하는 것에 아무 구애를 안 느껴요. 내게 배우는 직업이죠. 즐거운 직업이지만 그래도 직업이에요.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다면, 아무것도 안 합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는 미국영화계로 발길을 들여놓았다. 그의 첫 영어영화는 줄리안 슈나벨의 <비포 나잇 폴스>. 여기서 그는 주인공인 레이날도(하비에르 바르뎀)의 말년을 맨해튼에서 함께하는 레이날도의 친구 라자로를 연기했다. “레이날도, 나한테 글 쓰는 걸 가르쳐줄래요?”라고 하자 쿠바의 시인 레이날도가 “그건 불가능해”라고 답하는, 그 라자로. 그리고 <언페이스풀>은 그의 본격적인 첫 할리우드 영화다. 성애를 이야기의 골격으로 삼는 영화지만, 이 영화에서 마르티네즈는 나체 연기를 거부했다. “사람들은 성격이 다 제각각이죠. 배우도 마찬가지예요. 벗는 배우도 있고 아닌 배우도 있죠. 난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수줍음이 많아요. 이 영화를 찍으면서, 나는 나체 연기를 요구하면 연기를 안 하겠다고 감독에게 못박았어요. 연기를 원하냐, 나체를 원하냐. 감독더러 택하라 했죠.”

몇몇 성급한 사람들은 이제 그에게 묻는다. “올리비에, 다시 프랑스로 돌아갈 건가요?” 마르티네즈는 할리우드의 스타덤 속으로 동화되기에는 아직 상당히 유럽적이고 비상업적인 배우다. 그러나 그는, <언페이스풀>의 경험이 그렇게 싫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미국에서 좋은 작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언페이스풀> 다음 작품으로 헬렌 미렌과 앤 밴크로포트가 출연하는 미국 TV드라마 <스톤 부인의 로마의 봄>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로케 촬영하는 작품이다. 그가 정말로 할리우드를 택했다고 말하기엔 아직 이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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