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임은경 인터뷰 (2)
2002-09-07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동화를 부수고 세상 속으로 `소녀`를 죽이고 나서,저주가 풀렸습니다

오늘도 소녀는 하루종일 걸으면서 라이터를 팔았습니다. 그러나 라이터를 사주는 사람이 없어서, 하나도 팔지 못했습니다. 부산 사람들은 인심이 야박한가 봅니다. “라이터 사세요… 라이터 사세요.” 분홍빛 넝마를 입고 추운 거리를 하루종일 걷습니다. 그만 걸으라고 말하는 이가 없습니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아무 생각하지 말라’고만 합니다. 왜 라이터가 안 팔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이터를 팔기란 쉽지 않구나, 소녀는 생각합니다. ‘머리곱슬붕떠’ 아저씨가 저리로 가서 이야기 좀 하지 않으련, 하고 다가옵니다. 소녀, 사랑이 뭔 줄 알아? 분노는? 싸움은 뭘까? 왜 소녀는 라이터를 팔고 있는 걸까? 참 이상한 아저씨입니다. 소녀가 먼저 라이터를 팔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저씨와 한참을 걸은 뒤부터 ‘내가 뭘하고 있는 거지?’ 소녀는 생각합니다. 머리 위를 헤엄치던 단어들이 하나하나씩 가슴에 박혀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어디서 태어났고, 어떤 행동과 어떤 모습을 하고 있지?… 중얼중얼 자신에게 다시금 묻곤 했습니다. 놓으면 흐트러질 것 같아 항상 긴장하면서 그 질문들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차가웠던 손이 조금씩 녹고 피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쑥스러워 말도 잘 건네지 않던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전에 없는 어리광도 피워보고 농담을 해보기도 합니다. “이제 라이터가 잘 팔릴 것 같은데…” 할 때쯤 사랑하는 가준오가 시스템으로부터 죽임을 당합니다. ‘아, 오늘이 마지막 촬영이구나’라고 소녀는 생각했습니다. 괜스레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슬프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별 중에서 하나가 땅으로 흘러 떨어졌습니다. “별이 흐를 때에는 그때마다 한 사람의 영혼이 하느님에게 올라가는 거란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소녀에게 이야기해주신 말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바닷가 절벽 위 소녀는 입가에 웃음을 띄운 채 죽어 있었습니다. 제주의 떠오른 태양이 소녀의 자그마한 몸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소녀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소녀’를 죽이고나니 소녀는 달라졌습니다. 세상도 참 달라 보였습니다. 높은 굽의 구두를 신기도 하고, 화장을 하기도 하고, 웃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색하고 이상했던 것들이 차츰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대화하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것들이 다 행복인 것 같아. 이제 성냥불의 온기가 없어도, 라이터의 가스가 없어도 춥지 않겠는걸….’ 소녀가 떠난 자리에 어딘가 소녀를 닮은 한 여자가 그렇게 되뇌고 있었습니다.

* 이 글은 임은경과의 인터뷰 내용을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의 틀을 빌려 재구성한 것입니다.

장선우 감독이 말하는 임은경

"저 애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이번 영화는 이미지와의 싸움이라고 봤거든. 그래서 꾸며진 이미지들로 가득 찬 영화로 갔지. 거기에 임은경이란 배우의 만들어진 이미지를 갖고 오고 싶었던 거지. 근데 연기에 들어가니까 이 아이가 엄청 경직됐어. 사실 그런 현상은 몇번 봤거든…. <꽃잎>의 이정현도 처음 왔을 때, 맨 처음 찍은 거 다 버렸다고. 그런데 임은경은 사실 도가 더 심한 거야. 연기 내용이 안 채워지니까, 시간이 걸리겠네, 내가 이미지에 속았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사실 내가 이미지를 만들면 되는데 그냥 이미지를 따 먹으려다 보니까…. 그래서 답답해서 은경이 데리고 한번 쭉 걸으면서 물었어. 너 연기하면서 무슨 생각하니, 그런 얘기부터. 나도 처음엔 기계적인 연기, 작은 인형처럼 표정없이 라이터 팔고 다니는 거나 해라, 그랬는데 그게 쉽게 안 되는 거지. 역시 얘의 내면은 만만치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쉽게 모방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거든. 연기하면서 생각을 잡아줄 수 있는 코드가 필요하겠구나 생각해서 걸으면서 말했어. 나는 누군지 생각하라고. 왜 걸어다니면서 라이터를 팔지, 나는 여기 왜 있지, 이런 생각 하라고.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더니 그때부터 연기하는 게 달라지는 게 느껴져. 사실 ‘나는 누구지’가 화두니까. 그때부턴 표정도 달라. 이후로 스스로 커나가는 모습이 굉장히 멋있었어. 마지막엔 신기가 올랐네,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표정도 독하게 나오고. 1단계 마지막에 가준오가 제주도에서 죽는 신은 걔 연기가 좋아서 편집이 길어졌어. 어떻게 저런 연기까지 왔지? 그 딱딱하게 굳어 있던 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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