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졸업>을 본 것이 중학교 3학년 때다. 종로 뒷골목에 있던 아카데미 극장에서였다. 그 극장은 재개봉관, 그때 말로 2류 극장이었다. 매표구 위에는 ‘미성년자 입장 불가’가 선명했는데, 아무튼 나는 입장했다. 규율은 늘 위반으로 마무리되니까. 내가 할리우드 영화를 즐기는 건 그것들이 대체로 해피엔딩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더러 언해피하게 끝나더라도 그 불행은 대개 감미료를 둠뿍 친 멜랑콜리에 가깝다. 극장 밖의 현실은 온갖 불행으로 그득 차 있으므로, 영화를 보면서까지 그 불행을 되씹으며 자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철학이다.
그래서 <졸업>의 해피엔딩에 나는 흡족했다. 번역자의 지나친 배려 때문에 로빈슨 부인이 일레인의 어머니인지 숙모인지가 좀 섞갈렸지만.
우선 그 영화를 인상적으로 만든 건, 다른 관객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의 노래들이었다. <스카보로 시장> <침묵의 소리> <로빈슨 부인> 같은 노래들을 내가 그 영화에서 처음 들었는지, 아니면 그 이전부터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영화를 본 뒤에는, 그 노래들을 지겹도록 들었다. <졸업>은 스토리나 그림 못지않게 소리로 한몫 본 영화다. 그러나 그 영화에서 노래들보다 더 내 뇌리에 깊이 박힌 것은 일레인 역을 맡은 캐서린 로스의 미목수려(眉目秀麗)다. 나는 세상에 저렇게 기막히게 빚어진 여자가 있었단 말인가 하며 넋을 놓았다.
과장없이 적어도 그뒤 한달간, 나는 밤마다 나의 캐서린을 생각하느라 잠을 설쳤다. 그뒤 오래도록 나는 친구들에게도 캐서린 로스의 미색에 대해 떠벌렸지만, 불행하게도 그때마다 내 심미안을 의심받았을 뿐이다. 그런 떡대가 어디가 좋으니?(아닌 게 아니라 캐서린 로스의 어깨는 남자 못지않게 넓다.)
세월은 흘러서 1993년 4월 말. 나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르투케라는 해변에 있었다. 유럽에서 8개월간의 저널리즘 연수를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일종의 졸업여행을 온 것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베르뒤르라는 카페에서 나는 주잔나라는 여자 동료와 종알대고 있었다. 주잔나는 부다페스트에서 온 친구였다. 우리는 연수 기간 내내 붙어다녔다. 침대를 함께 쓰지는 않았지만. 르투케의 베르뒤르에서, 문득 십대 때 본 영화 <졸업>이 생각났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졸업여행’중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그것은 주잔나의 어깨가 캐서린 로스의 어깨처럼 쩍 벌어져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카페에서 내다보고 있던 바다의 쪽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이 옳다면, 영화 <졸업>에는 푸른 빛의 이미지가 또렷하다. 그것도 물빛이다. 비록 바닷물이 아니라 풀장의 물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나는 주잔나에게 <졸업> 얘기를 꺼냈다.
아쉽게도 그녀는 그 영화를 못 봤더구먼. 그때 우리는 우리가 돌아갈 도시들에 대해서, 그러니까 서울과 부다페스트에 대해서 얘기했다. 나는 단지 이틀 동안 머물렀을 뿐인 부다페스트에 대해 그녀에게 얘기했고, 그녀는 오로지(1988년 올림픽 때) 텔레비전으로만 본 서울에 대해 나에게 얘기했다. 브라운관 속에서 본 서울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에 대해 그녀가 떠벌리기에, 나는 육안으로 보는 서울, 숨쉬고 살아가야 하는 서울이 얼마나 흉하고 끔찍한 지옥인지를 찬찬히 얘기함으로써 그녀의 지리학적 교양을 크게 함양시켜 주었다.
최근에 <글루미 썬데이>라는 영화를 비디오로 봤다. 사람 여럿 죽였다는, 같은 제목의 노래가 좋아서 영화까지 보게 된 것이다. 영화 도입부에 비치는 부다페스트 시가를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저기 가본 게 언제던가, 언제라도 다시 가볼 수는 있을까, 저기 어디쯤 주잔나가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마구 솟구쳤다. 브라운관 속의 부다페스트는 내가 실제로 본 부다페스트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아무렴! 마땅히 그래야지!
영화를 보는 동안 내 머릿속의 주잔나는 그 영화의 여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이름을 모르겠다. 그냥 ‘글루미’라고 부르자)로 대체됐다. 정말 어디서 기가 막히게 예쁜 아가씨를 찾아내 캐스팅했군, 하고 나는 감탄했다. 이 우울하기 짝이 없는 영화가 헝가리산(産)인지 독일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막판의 할리우드식 ‘해피엔딩’- 권선징악 레슨이라고 해야겠지- 이 나를 위로했다. 마지막 장면에 늙은 글루미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나는 뭔가 개운치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격조라는 측면에선 그 부분이 없는 게 더 나았겠지만. 글루미는 캐서린 로스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캐서린 로스가 활명적(活命的)으로 아름답다면, 글루미는 치명적으로 아름답다. 그 사이에 내 취향이 변한 것일까? 아니다.
나는 지금도 캐서린 로스와 글루미가 동시에 좋다. 얼마 전 친구와의 술자리 대화 한 토막.
나 : 난 TV 연기자 가운데 한혜숙씨와 유호정씨가 젤 좋아.
친구 : 둘 다 미인이고 분위기가 있지만, 계열이 전혀 달라. 어느 한쪽을 좋아할 순 있지만, 두 사람 다를 좋아한다는 건
이해가 안 가네.
나 : 난 광폭미감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