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의 내 꿈은 당구 선수가 되는 거였다.탁구장 한쪽 구석에 놓여져 있던 미니당구대가 꿈의 산실이었다.
드디어 각고의 노력 끝에(난 당구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처음 큐를 잡은 지 불과 몇달 지나지 않아 그 미니당구대에서는 날 이길 사람이 없게 되었다. 기고만장해진 중학생의 가슴에 더욱 불을 지른 건 영화 <허슬러>였다.
주말의 명화에서 본 <허슬러>의 폴 뉴먼은 너무나 근사하고 멋있었다.그래서 난 종종 잠들기 전 이불 속에서 당구대회에 나가 멋지게 우승하는 은밀한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러면 난 곧 폴 뉴먼이 되었고, 행복하게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미성년자는 진짜 당구장을 출입할 수 없었고 내 꿈은 거기서 멈춰야 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내 영화구경은 TV에서 하는 영화 꼬박꼬박 챙겨보고 쌀집 아들과 친구인 행운으로 초대권을 가지고 동네 삼류 극장을 찾아다니던 지금까지 수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시내의 개봉관을 찾아다니며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난 실제로 극장을 찾아다니면서 서울시내 지리를 익혔다).
내가 영화과에 입학한 80년대 초반 지금은 독립영화 진영의 독보적 존재가 된 N선배가 어느 날 은밀하게 다가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러 가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두말하면 숨차지! 그 길로 선배를 따라 풍전호텔 근처의 사무실로 갔다. 당시는 비디오도 흔치 않던 시절이라 플레이어가 있는 사무실이 상영장소가 된 것이다. 거기엔 10여명이 첫 미팅에 나가는 고등학생 같은 얼굴을 하고 모여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자 말론 브랜도가 달리는 지하철의 굉음에 귀를 틀어막으며 “Fucking God”이라고 절규하는 크레인숏으로 촬영된 오프닝이 나왔다. 심상치 않았다. 그러더니 생면부지의 남녀가 텅 빈 아파트에서 만나자마자 섹스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 영화는 그때까지 내가 본 어떤 영화보다도 상황설정과 표현이 도발적이었다. 단지 섹스를 거침없이 표현한 것말고도 거기에는 날 사로잡는 강렬한 그 무엇이 있었다.
영화가 끝난 뒤 선배들은 저마다 베르톨루치의 성 정치학에 대해 얘기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 번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본 건 몇년이 지난 80년대 말이었다. 당시 난 장산곶매에서 열혈 동료들과 열심히 독립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는 자막이 있는 비디오가 돌아서 영화의 세세한 부분을 비로소 파악하며 볼 수 있었다.
처음 영화를 봤던 그때의 강렬한 감정은 다시 맛보지 못했지만 여전히 멋진 영화였다. 베르톨루치가 곳곳에 깔아놓은 정치적 은유들(아내의 이름은 로자 룩셈부르크에서 따온 로자이고, 잔은 아들을 낳으면 피델이라고 이름을 짓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부르주아의 완고함과 권력을 상징하는 대령의 모자 등등)도 좋았고 비토리오 스트라로의 유려하고도 질감이 풍부한 화면 역시 휼륭했다.
그리고 다소 꿰어맞춘 듯하지만 여자가 잔이라고 제 이름을 말하며 폴에게 총을 발사하는 마지막 장면도 그것의 상징적 의미를 떠올리며 보았다.
세월이 많이 흘러 세 번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본 건 최근의 일이다. 이번엔 두세번 카피된 비디오가 아니라 선명한 화질의 DVD였다. 처음 보았을 때와 거의 20년의 시차를 두고 다시 본 영화에서 나에게 다가온 건 처음 보았을 때의 뭔지 모를 강렬함도, 좌절한 68세대의 정치적 은유도 아니었다.
그건 말론 브랜도가 연기한 폴이라는 남자의 고독이었다.
영화 후반부에 자살한 아내 로자의 시신 앞에서 폴이 약 6분간의 긴 독백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폴은 말한다. 우주진리는 이해할 수 있을지언정 사람의 속마음은 200년을 같이 살아도 모를 거라고…. 도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누구냐고. 왜 그런 짓을 저질렀냐고….
그 장면은 로자에게 길거리의 여자같이 화장을 했다고 비난하는 걸로 시작해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폴로 끝난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이 날 사로잡았고, 폴과 마찬가지로 내 눈에도 소리없이 눈물이 흘렀다.
부정하고 싶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존재의 외로운 숙명과 본원적 고독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리고 미국의 시골에서 태어나 세계 각지를 전전하다 중년의 나이에 파리의 허름한 여관에 힘들게 정착한 폴의 인생과 그가 받은 상처에 가슴이 져며왔다. 폴이 받은 상처는 그를 변화시켰고, 그것은 잔에게로 날아갔다가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 결국은 폴을 쓰러뜨렸다.
폴의 말처럼 인간은 죽음을 앞두고 만감이 교차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는 걸까? 그럼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 <매그놀리아>의 경찰관 짐의 말처럼 인생을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되는 건가?
하긴 누가 알겠는가? 죽음이 다가와 지난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인생의 비밀들이 명료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맞기 전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