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파시즘 선전영화의 대표적 인물로 지난 반 세기 동안 추앙과 질책을 동시에 받아왔던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이 지난 8월에 100살을 맞았다. 여인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가장 말썽 많았던 인물”답게 숱한 화젯거리를 만들면서 미디어의 여파를 계속 타고 있다. 우선 독일에서만도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쥐트도이치 차이퉁> <디 차이트> 등 일급 신문에서부터 <보그> <안나벨> 등의 대중 여성잡지에 이르기까지 100주년 생일을 배경으로 큼직큼직한 기사가 나갔고 독일의 제1, 제2 국영 텔레비전과 아르테는 물론 지방 방송사들이 서로 다투어 특집 프로그램을 짜서 여러 차례 방영했다.그 밖에도 그와 관련된 전기, 사진집들이 새로 출간되고 그의 영화에 대한 글과 회고전이 여러 곳에서 발표되는 등 그야말로 리펜슈탈 증후군이 퍼지고 있는 와중에 100살 노인이 ‘세상을 위한 선물’을 내놓아 또 하나의 화제가 됐다. 선물의 내용물은 9월 초 베를린에서 초연된 신작 다큐멘터리 <해저의 인상>으로 리펜슈탈이 1956년 영화작업을 중단한 뒤 49년 만에 다시 연출한 것으로서, 71살 때 스쿠버다이빙 시험을 통과하고는 2천번이나 바닷속을 드나들며 30년에 걸쳐 끝마친 현대판 오디세이 작품이다.
스위스 텔레비전을 통해 영화의 일부를 봤지만, 무거운 산소 호흡기를 달고 지중해의 깊은 바다 밑에서 물고기떼들을 따라다니며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에 열중하고 있는 감독의 얼굴엔 어떤 비장한 결의마저 엿보였고, 영화에 대한 집념 또한 대단해 몇 십년 동안 찍은 엄청난 분량의 필름을 집에서 혼자 편집했는데, 이 영화에 자신의 명예를 걸고 있는 듯 작업에 혼신의 힘을 쏟았던 것 같다.리펜슈탈은 작품 동기에 대해 마틴 루터 킹의 유명한 1965년 연설 가운데 ‘나에겐 꿈이 있다’를 인용하면서 “내 꿈은 지구의 자연 보존이며 나는 70년대 초부터 녹색운동 그린피스의 회원”이라고 했다.
동기야 어쨌든 리펜슈탈은 <해저의 인상>을 들고 영화감독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어쩌면 정치와 상관없는 ‘비전’의 영화를 만들어 과거의 누명을 씻고 다시 감독으로서의 명예회복이 이뤄지길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만 않는 듯하다. 독일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봐서 리펜스탈에 대한 경계심이 그렇게 쉽게 늦추어질 것 같지 않고, 한동안 그토록 푸짐했던 언론 프로그램도 따지고보면 인간 리펜스탈보다는 이제 몇 남지 않은 나치정권의 심벌로서 더 관심을 끌었던 게 사실이다. 예상대로 감독의 나치정권 협조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고, 그와 더불어 예술의 창조적 자유와 감독의 사회모럴에 대한 문제제기가 다시 여론을 들끓게 했다.그런 상황에서도 리펜스탈은 조금도 자성하는 낌새를 보이지 않은 채 한결같이 "나는 나치 당원도 아니었고 나치 이데올로기를 따른 적이 없다.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며 내게 중요한 건 영화의 형식미고 내용엔 관심이 없다.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는 히틀러의 위탁으로 만들어진 영화였지만 난 그 때문에 숱한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라는 이미 너무도 잘 알려진 무죄 주장을 반복했고, 여인의 뻔뻔함에 분노한 언론쪽에선 리펜스탈을 대고 “동침을 못했던 히틀러의 연인(<슈피겔>), 홀러코스트 경고 기념물(<디 차이트>), 파렴치한 인간(<팍트>)” 등의 악평을 퍼부었다. 그리고 런던의 일간지 <디 인디펜던트>는 “리펜스탈이 나치 과거를 파묻기 위하여 마지막 시도로서 물고기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꼬집었다.리펜스탈은 자신의 과거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자기는 전후 50건의 법적 소송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실지로는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기 위한 빈틈없는 전략의 결과다. 예를 들어 히틀러 앞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춤을 췄다는가, 아돌프 아이히만을 위해 집단수용소에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비방이 사실이 아님이 판명된 정도다. 그와 달리 리펜스탈은 1969년에 나치 시기에 나온 자신의 영화에 대한 사용권 신청을 했으나 판사로부터 무효 판결을 받았고, 최근에 리펜스탈의 거짓말이 폭로되는 사건이 터져 지금 법적 처리를 기다리고 있다. 리펜스탈은 1940∼44년 사이에 <낮은 땅>을 만들면서 집시들을 단역배우로 썼고 이들 거의가 나중에 집단수용소에서 죽었다. 그럼에도 리펜스탈은 올 4월에 어느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 자신의 영화에 협조한 덕분에 안 죽고 모두 살아 남았다고 했는데, 그게 유가족들의 소송으로 거짓말임이 드러났고 리펜스탈의 입에서 처음으로 용서를 비는 말이 나왔다. 리펜스탈은 언젠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언론의 공격에 분노하여 “나는 기자들의 공격에 죽임을 당하여 유령이 됐다”고 했는데, 리펜스탈의 유령 현상에 대해 영화평론가 엘리자베스 부론펜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리펜스탈은 창조면에서는 세기적인 인물이다. 그의 영화는 오늘까지 영향을 끼칠 정도로 천재적 재능을 보이는 데가 있다. 문제는 여인의 꺾일 줄 모르는 자가당착이며 그로 인해 생기는 역사에 대한 왜곡을 우리는 받아줄 수 없기 때문에 논쟁은 끊임없이 생길 수밖에 없다.” 국내 여론과 아옹다옹하는 사이에 리펜스탈을 지지하는 단체나 개인이 90년대를 지나면서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갈수록 늘고 있다. 리펜스탈은 <프랑크푸터 룬트샤우>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언론은 아주 긍정적이다. 조디 포스터, 스티븐 스필버그, 마돈나가 나의 삶을 영화화하고 싶어하고 나는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고 하면서 현재 자기 영화는 전세계에서 가장 비싼 값으로 팔린다고 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최근 일부 여성 언론·영화인들이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리펜스탈의 삶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의 이름난 페미니스트 언론기자 엘리스 쉬바르저는 “살인적인 시대를 만나지 않았다면 리펜스탈은 오늘 틀림없이 20세기의 천재 여성감독으로 인정받았을 텐데, 독일 국민 대부분이 그랬듯이 그도 히틀러에 홀렸던 것인데 그들과 다른 점은 히틀러도 리펜스탈에 홀렸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독일의 페미니즘 영화감독 헬마 산더 브람스는 “리펜스탈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큰 나머지 50년이 지난 뒤에도 그의 영화를 배척하는 독일 지성계의 행동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면서 남성평론계에 항의 질문을 던졌다. 또 미국 웨슬리언 칼리지의 영화학 여교수 지닌 베이싱어는 만일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를 남성이 만들었다면 그 사람은 그리피스 다음가는 유명 감독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대학의 저명한 영화학과치고 리펜스탈의 작품을 사용하지 않는 데가 없지만 감독의 이름은 항상 뒷전으로 밀린다”고 공정치 못한 학계의 현실을 비평했다.그런가 하면 할리우드의 배우 출신의 감독인 조디 포스터는 “20세기에 어떤 여성도 리펜스탈처럼 비방과 찬사를 받지 못했다. 그는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여성이 될 재능을 갖고 있다”며 리펜스탈의 삶에 대한 영화를 만들 예정이며 연기와 연출을 자신이 맡겠다고 했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여성 수필가 수잔 손탁은 리펜스탈의 영화는 파시즘의 미학을 기본틀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현실의 미화, 건강한 신체의 강조, 흠 없애기” 등을 예로 들었다. 바젤=임안자/ 해외특별기고가▶ 리펜스탈의 다섯 조각의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