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개봉 열흘 만에 200만 관객 동원한 <가문의 영광> 감독 정흥순
2002-10-02
글 : 박은영
사진 : 오계옥
˝나는 상업영화 감독,관객반응 좋으면 만족˝

추석 극장가의 승자는 단연 <가문의 영광>이었다. <가문의 영광>은 개봉 열흘 만에 200만 고지를 가뿐히 넘었고, 이 기세라면 <집으로…>가 세운 올해 흥행 기록까지 경신할 것으로 보인다. ‘막가파 코미디’라며 싸늘히 등을 돌린 평단과 달리, 관객의 80% 이상이 “매우 재밌다”고 ‘강추’하고 있는 걸 보면, <가문의 영광>의 흥행 돌풍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관객 공략에는 성공한 셈이다.

정흥순 감독에겐 이것이 ‘20년 만의 영광’이다. 김기영 감독과 고영남 감독의 연출부로 시작해 <결혼 이야기> 등의 제작부장을 지낸 뒤 호주 올 로케영화 <현상수배>로 연출 데뷔한 그는 4년 만에 두 번째 영화 <가문의 영광>을 내놓으며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결연함으로 현장을 지켰다고 말하고 있다. 나란히 첫 작품을 내놓고 한가한(?) 시간을 함께 죽이며 친구가 된 김기덕 감독이 <파란 대문>부터 <해안선>까지 모두 6편의 작품을 내놓는 동안, 그는 오로지 <가문의 영광> 한편을 품고 다듬어 왔다. 본인의 컨셉은 ‘저예산’이라며 칼국수를 사주곤 하던 김기덕 감독에게, 이제 정흥순 감독이 크게 한턱 쏠 차례다.

관객의 호응이 대단하다. 이 정도일 거라고 예상했나.

자신은 있었다. 찍으면서 연기자들과의 호흡도 좋았고, 현장에서 느낌이 아주 좋았다. 뭐, 이 정도로 잘될 줄은 몰랐고, 다음 작품은 할 수 있겠구나, 몇년 놀진 않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더라. (웃음) 코미디가 참 어려운 것이, 아무리 현장에서 재밌었어도, 편집 과정에서 그 느낌을 다시 불러내기가 힘든데, 현장에서의 재미와 즐거움, 감각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대박도 운인 것 같다. 요즘 시스템에서 톱 배우들 데려다 잘 찍으면, 200만명까지는 인력으로 된다고 본다. 진인사재천명이라고, 나머지는 운에 맡긴다.

평범한 남자가 우연히 폭력 조직에 엮이고, 그 과정에 사랑을 얻는다는 소재면에서, <현상수배>와 <가문의 영광>은 비슷해 보인다. 관객의 반응이 다른 건, 결정적으로 어떤 차이에서일까.

<현상수배>는 애초에 로맨틱코미디로 구상한 영화다. 뉴욕에서 찍으려던 것이 시드니로 바뀌면서, 액션이 많이 추가됐고, 섹스코미디 부분도 다 잘려나갔다. 주연배우 박중훈에게 중학생 팬이 많아서 등급을 맞춰야 한다는 거였다. 갑자기 환율 올라서 제작비는 오버됐지, 호주 스탭들 노동 시간은 맞춰야지, 수족이 다 묶인 거나 다름없는 상태로 찍은 영화다. 아쉬움이 많다.

평단의 반응은 좋지 않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신문이나 잡지에 나온 영화 평을 거의 읽지 않는다. 나는 상업영화 감독이고, 관객의 반응이 좋으면 그걸로 만족한다. 평자들의 잣대란 게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런 영화는 어떤 잣대로 평가해야 하는 건가. <가문의 영광>은 <오아시스>와 같은 잣대로 평가할 영화가 아니다. 나 자신도 영화를 좋아하지만, 보고 즐기는 기쁨을 잊어가는 것 같아 슬플 때가 많다. 평자들은 더한 것 같다. 내 영화가 이 사회에 무슨 악을 끼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난 그저 돈 내고 오신 분들을 1시간50분 동안 즐겁게 모실 뿐이다. 배우들이 무대 인사할 때 “아무 생각없이 봐달라”고 했지만, 그건 아니다. 물론 편집 과정에서 ‘재미’ 위주로 추린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영화의 시작은 ‘인연’과 ‘가족’, 그 두 단어였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그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영화 재밌게 보고 돌아가면서, 내 가족 한번 돌아보길, 시집간 누나나 군대간 동생 생각, 한번 더해 보길 바랐다.

초기의 아이디어는 조폭 집안에서 엘리트 사위 들이는 과정을 통해 권력 불리기의 세태를 풍자하는 것이었다고 했는데, 그런 의미를 담기에 괜찮은 소재였다는 아쉬움이 든다.

강준만씨의 <서울대 나라>라는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 우리나라가 사실 서울대 나라 아닌가. 80년대의 한국은 특히 육사와 서울대의 나라였다고 생각한다. 쓰리제이 가문이 육사를, 대서가 서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그들의 파워게임과 세력 불리기를 풍자하고자 했다. 초고는 그랬는데, 기획 과정에서 여러 번 수정을 거치면서, 멜로 코드도 들어가고, 오빠들 얘기도 강화하다보니, 애초의 의도와는 다른 영화가 됐다.

이전의 인터뷰에서 <가문의 영광>은 본인의 색깔이 덜 드러난 작품이라고 한 것은 그런 의미인가.

타협의 선을 정해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하고 했다는 뜻은 아니다. 물감을 섞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까. 희석되고, 변색된 것이다. 풍자를 하고자 했으나, 그런 요소들이 사라져버렸다.

코미디에 멜로와 액션누아르 등 여러 장르적 요소가 혼재돼 있는데, 그런 시도에 대해 관객 반응은 ‘그래서 지루하지 않다’는 평과 ‘이도저도 아니다’는 평으로 나뉘는 것 같다.

멜로없이 끝까지 가면, 남녀 주인공이 너무 수동적으로 보일 것 같았다. 그리고 ‘가문의 영광’인데, 형제애, 가족애를 한번은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 결혼식장 신을 넣은 것이다. 관객이 부담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고, 드라마적으로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믿었다. 드라마 기법상 매끄럽지 않은 건 인정한다.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가져가고 싶은 이야기들을 살려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상황이 재밌기 때문에 특별히 오버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곁가지 에피소드들을 보면, 웃음에 대한 강박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캐스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영화의 색깔이 달라진다. 진경을 김정은이 아닌 다른 배우가 했다면, 전혀 다른 영화가 나왔을 거다. 우리 영화에 모인 배우들은 저마다 웃겨보자는 욕심들이 많았다. 배우들이 오버하려 할 때마다, 이 영화는 드라마가 튼튼하니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하곤 했다. 진경의 캐릭터는 멕 라이언이나 카메론 디아즈의 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김정은도 ‘능동적이진 않지만 사랑스러운 여자’ 진경을 잘 살려냈다고 본다.

캐스팅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김정은은 기존의 이미지를 잘 살렸고, 정준호와 유동근은 기존의 캐릭터 이미지를 뒤집어놓았다.

김정은은 CF를 보면서부터 영화 한편 같이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성별은 다르지만, 내 ‘페르소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촬영을 하면서 애정이 더 깊어졌다. 다른 남성 캐릭터에 치일까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정준호도 이전에 본 어떤 영화에서보다도 부드러웠다. 언제 먹고 언제 묻힐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망가지자’ 작정한 유동근씨 욕심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난 지켜만 봤다. 진용을 짜놓고 보니, 내가 특별히 할 게 없었다.

코믹 요소를 심을 때, 타깃으로 삼은 관객층이 있었을 것 같다.

주타깃층은 20대 초반 관객이었다. 그런데 30∼40대 주부 관객이 유난히 많이 든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유동근씨의 힘이 아닐까. 캐스팅 단계에서 그런 기대는 하고 있었다. 사실 유동근-진희경-유혜정의 삼각관계 에피소드는 제작진 내부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영화의 큰 줄기로 봤을 때 굳이 필요한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빼고 나니 심심하기도 했고, 유동근씨를 보러 오는 관객을 배신하고 좌절시켜선 안 될 것 같았다. 실제로 유혜정이 남편(유동근)의 애인(진희경)을 때리는 장면을, 아줌마 관객이 무척 통쾌해하며 좋아했다. 10대 관객을 위한 서비스도 있다. 귀여운 판타지, 만화 같은 장면들이 그런 것들이다.

데뷔 이전에 제작부 생활을 했다.

그전에 연출부 생활을 남부럽지 않게 오래 했다. 대학 때 김기영 감독의 <화녀> <충녀> 같은 여자 시리즈들을 보면서, 건방지게도, 내가 배울 감독은 저분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83년에 김기영 감독 연출부로 들어가서, 밥하고 빨래하면서 감독님 수발들고, <바보 사냥>이라는 영화 한편 하고 나왔다. 그리고는 고영남 감독님 연출부로 들어가 네 작품을 했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숲 속의 방> 제작부장을 했고, 마무리는 못했지만 <결혼 이야기>의 제작부장도 했다. 89년에 시나리오 공모에서 입상도 했는데, 상처한 남자와 여대생의 성적 행로를 그린 에로물이었다. 제작부나 시나리오 공모도 좋은 경험이었지만, 연출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를 알고 있던 모든 제작자들이 어느 순간 공룡처럼 사라져버렸고, 신진 제작자들은 예비감독보다는 제작부장으로서의 나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작이 쉽지 않았다.

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 꽤 오래 전 일이라고 하는데, 어떤 영화들을 보면서 그런 꿈을 키웠나.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한 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전의 일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거의 극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무숙자 시리즈, 핑크팬더 시리즈, 왕우의 무협영화, 이소룡 영화, 히치콕과 샘 페킨파의 영화들을 좋아했다. 코언 형제의 영화들도 좋아한다. 그런 영화들을 좋아해서인지, 만들 때도 액션과 코미디가 같이 섞여들어가는 것 같다. 멜로 한번 해보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는데, 멜로는 왠지 닭살이 돋는다. 코미디와 결합된 멜로라면 모를까.

써놓은 시나리오가 다섯편쯤 된다고 들었다. 어떤 작품들인가.

<바운드> 같은 느낌의 에로물이 하나고, 나머지 넷은 전부 코미디다. 그중 제일 아끼는 시나리오는 성적 코드를 전면에 드러낸 코미디고, 차기작으로 생각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아빠 직업을 아는 나이가 돼서, 다음엔 어떤 영화 만드냐고 궁금해 해서 좀 걱정이다. <가문의 영광>도 못 보여줬는데, 드러내 놓고 야한 영화는 또 어떻게 보여주나. (웃음) 아무튼 밝은 영화를 하고 싶다. 코언 형제 영화처럼 말 많은 코미디도 좋고, 강박 관념 같은 인간 심리를 그린 영화도 해보고 싶다.

이제껏 만든 영화들도 모두 코미디고, 앞으로도 이변이 없는 한 코미디를 할 텐데, 코미디에 대한 나름의 소신이 있다면.

작품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편할 텐데…. <가문의 영광>은 좀 업(up)된 코미디였다. 물론 막 갈땐 막 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종 깔깔대게 하는 코미디보다는, 잔잔하게 미소짓게 하는, 그런 코미디를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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