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나의 ‘내인생의 영화’가 <엑스맨>이라고 한다. 왜? 별로 기억에 남는 장면도 없는데? 알고보니, 영화관에 들어가기만 하면 지루한 장면에서 졸기 시작해 좀처럼 깨어날 줄 모르는 내 상태를 너무도 잘 알고 한 말이었다. 영화일로 밥벌이하고 사는 주제에,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무지 고생한 스탭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매너없이 꿈나라로 빠져드는 자신이 한심하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재미없는 건 도저히 못 참아!
강남역 근처 모극장에서 <엑스맨>을 보는 동안은 희한하게도 전혀 잠들지 않았는데, 영화가 재미있었다기보다 결혼 전 남편과 데이트하는 설렘과 강남역의 젊은 기운이 뭉쳐져 생성된 에너지가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도 있었지. 몇년 전 기억인데도 70살 넘은 노파 같은 상념에 빠져든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나의 ‘첫’ 미팅. 하필이면 첫 타석에서부터 완벽한 킹카가 나올 게 뭐람. 어쨌든 그날 난 그 넘 마음에 들고 싶어 안달했고, 결국 다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완벽한 꽃치장을 하고 나가느라 법석을 피웠던 것은 당연지사. 예쁘게 보이고 싶어 당시 유행한 드라이 파마(일명 왕자머리)를 하고 엄마의 보라색(그런 이상한 색깔은 그 옷 이후로 본 적이 없다) 코트를 걸쳐 입은 것까진 좋았는데, 내 애초 의도와는 상관없는 전위적인, 요상한 여고생으로 변해버린 것이 문제였지만. 할 수 없지, 성숙미를 보여주마. 자아도취되어 주제도 알지 못한 채 만날 장소로 나갔다.
생긴 것도 반반하고 입가에 이유 모를 비웃음을 항상 띠고 있는 그 녀석이 어린 마음에 멋있어 보였던 나는 만나기 몇분 전이 되자 심장이 너무 뛰어서 도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아, 그런데…. 날 보자마자 실망한 그 넘의 표정이라니…. 예상한 반응이 나오질 않자 당황한 나는 “오늘 볼 영화가 뭐냐”고 물었다. “뭐시기? 언터치… 뭐?” 전교 1, 2등을 다툰다던 그 넘은 정말 한심하다는 얼굴로 날 쳐다보더니 정확하게 ‘언! 터! 취! 어! 블’이라고 힘주어 발음하는 것이었다. 킹카긴 한데 왕싸가지라는 소문이 맞았다. 영화 볼 시간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던 나는 “꼭 재미없는 영화들이 제목은 어려워요”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무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감정상한 나는 남자친구와 처음으로 본 영화를 김이 팍 샌 상태에서 팔짱낀 채 감상해야 했다. 주인공들이 쏘아대는 총알이 내 가슴에 와장창 박혀들었다. 그러니 영화가 재미있을 리가 없지. 시간이 흘러흘러 비디오로 다시 그 영화를 보곤 깜짝 놀랐다. 참 좋은 영화였구나….
그 이후로 괜찮다는 영화는 꽤 봤지만 영화 한편 보면서 그렇게 속시끄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남에게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상대방은 무슨 생각을 할까, 왜 혼자 팔짱을 끼고 있을까, 왜 풀까, 숨소리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영화를 보던 여고생은 이제 없다. 하지만 절대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불안, 초조, 방황의 시기는 이제 안녕.
누구나 그렇겠지만, 남이 만든 영화를 보면서 재미있다, 없다를 잘도 구별해내면서 자신이 하는 일은 그렇지 못한 걸 보면 냉정함을 유지한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인 듯하다. 남의 자식 키우듯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듯 영화를 생각하면 잘할 수 있다는 얘기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많이 보면 볼수록, 아는 게 많아질수록 생각이 많아져서 관객의 눈으로 영화를 보는 일이 자꾸 어려워진다. 관객은 시나리오와 비교하면서 영화를 보거나 편집, 사운드 신경을 쓰거나 배우의 연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영화를 보진 않을 것 아닌가. 최대한 생각의 고리를 끊어야지…. 그러다보니 또 잠이 몰려오고. 아무 부담없이 영화보던 시절이 이럴 때는 ‘참’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