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 개봉 직후에 발행된 지난 366호(8.20∼27)에 평론가들의 리뷰를 모아 실었다. 결과는 <오아시스> 예찬론 모음이 됐다. 그때 이 영화에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면서도 몇몇 이유로 당장 쓰기 힘들다고 말했던 이중의 하나가 정성일씨다. 그동안 <오아시스>에는 찬사가 쏟아지면서 관객이 100만명을 넘었고, 그뒤에 받은 정씨의 글은 원고지 100매가 넘었다.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영화에 대한 뒤늦은 이의제기를 전하는 건, 성이나 장애자 문제 등 생각해볼 대목을 꼼꼼이 해부하는 이 글의 태도가 우리의 영화문화를 더 풍요롭게 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편집자
정성일의 <오아시스> 비판론
맨 처음, 그러니까 벌써 일년 전에 나는 올해 두편의 영화만큼은 절대 보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 한편은 김기덕의 <나쁜 남자>였고, 다른 한편은 이창동의 <오아시스>였다. 간단하게 소개된 줄거리가 너무 끔직해서 도무지 영화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두편 중의 어느 쪽도 피해갈 수 없었다. 그 결과 한편은 나에게 다행스러웠고, 다른 한편은 이상하게 여겨졌다. 다행스러운 영화는 보고 난 다음에도 불편한 감정을 유지시키게 내버려둔 김기덕의 <나쁜 남자>였다(이미 나는 이 자리에서 <나쁜 남자>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밝혔기 때문에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영화는 이창동의 <오아시스>였다. 나는 이 영화를 8월 두 번째 주 시사회에서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창동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너무 뻔한 이야기를 갖고 그저 그런 결말을 향해서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중언부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겨울에 반팔 옷차림으로 지금 막 감옥에서 ‘세 번째 별’을 달고 나와 담배 한대 달라고 사정하면서 세상으로 돌아온 사내, 집에서는 그가 잡혀간 사이에 가족들이 이사가고 면회도 가지 않은 게 분명한 이 어수룩한 남자, 오죽하면 형수로부터 면전에 대고서 “미안한 말인데요, 난 정말 삼촌이 싫어요, 정말로 미안한 말인데요, 삼촌이 안 계실 때는 살 것 같았어요”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올해 스물여덟살 또는 아홉살의 어수룩한 홍종두와, 그가 찾아간 피해자의 딸인 뇌성마비 장애자 한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처음부터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누구라도 ‘하여튼’ 지지할 수밖에 없는 전제를 안고 시작하는 이야기들. 모두들 감동받은 표정으로 영화관을 나섰다. 뭐, 어차피 그럴 줄 알았기 때문에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착한 이야기를 어떻게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몇개의 글을 읽으면서 갑자기 이상하다는 생각은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원래 이창동 팬클럽 회장인 조선희씨의 열렬한 지지는 예상했던 것이지만(<씨네21>, 2002_0806_0813, 364호) 그뒤로 이어지는 네편의 지지선언(<씨네21>, 2002_0820_0827, 366호)은 어리둥절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글들이지만, 내가 읽기에는 영화에 관한 글이라기보다는 소설에 가까웠고 특히 심영섭씨의 글은 시처럼 읽혔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좀더 꼼꼼하게 읽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이 영화에 관한 글(들)이 실린 <씨네21>을 읽고 싶다고 부탁했고, 임범 기자는 친절하게 황진미씨의 반론이 실린 367호(2002_0827_0903)도 보내주었다. 그 글은 일부는 동의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황진미씨의 견해일 것이다. <필름2.0>의 사이트를 찾아가서 거기 실린 문인들의 글과 편집위원들의 글도 읽어보았다. 물론 <오아시스>의 공식 사이트에 실린 글들을 읽었으며, 그리고 난 다음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그 다음에 이 글을 쓰기 위해 두번 더 보았다). 사실 나는 다시 본다고 해서 생각이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이 영화를 (무료 시사가 아니라 돈을 내고 영화관을 찾아와서) 본 사람들이 궁금해서 찾아갔다. 그날 여자들은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보았고,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남자들은 자못 감동받은 얼굴이 되어서 영화관을 나섰다. 일당 백의 반론을 쓰는 일은 매우 지루한 일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이 글이 귀찮아지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지만’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 <오아시스>는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연기상)을 받았다. 참으로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창동은 지금 주말 박스오피스에서의 승리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가는 이 한국영화 시장바닥에서 영화의 진정성을 믿는 드문 시네아스트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아시스>에 동의하지 않는다. 만일 이 영화가 수상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글을 쓰기 않았을 것이다. 상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영화에 대한 나의 입장에는 아무 의미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영화에 대한 반대의견을 침묵시키는 수단이 된다면 그건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여기서 시작한다.
당신은 진실을 보았는가?
<오아시스>는 아무리 말을 바꾸어도 결국은 홍종두와 한공주가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그걸 그냥 간단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전과자 홍종두와 가족에게 이용당하는 뇌성마비 장애자 한공주가 서로 만나서 우여곡절 끝에 서로 상처를 보다듬고 위로하고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몰라주어도 두 사람은 아마 앞으로 행복하게 살 것이다. 이 착한 이야기는 사실 동화에 가까운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면 세상의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홍종두 ‘장군’과 한공주 ‘공주마마’는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동화가 이상한 것은 낯선 장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여기 세상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세상 속의 믿음을 끌어들여야 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홍종두와 한공주가 만들어내는 동화를 믿는 사람은 그걸 지켜보는 우리뿐이다. 그런데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런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믿음의 숨바꼭질은 <오아시스>가 펼쳐 보이는 기만적인 환영술이다. 기만이라고? 그렇다. 아무도 그걸 믿지 않는 것을 당신만 믿게 된 것은 당신이 본 것을 믿는 데서 온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이 영화는 홍종두와 한공주의 사랑 이야기만큼이나 당신만을 위한 믿음의 절차를 물어보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홍종두의 형과 동생이, 한공주의 오빠가 그들 곁에서 살아가면서 보지 못한 진실을 당신은 본 것이다. 그런데 정말 본 것일까? 당신은 신데렐라의 진실을, 백설공주의 진실을, 콩쥐의 진실을 정말 본 것일까? 좀더 정확하게 당신이 보았다는 것은 어떻게 본 것일까? 또는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당신은 볼 수 있었던 것일까?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