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로드무비>의 배우 황정민
2002-10-16
글 : 황혜림
사진 : 오계옥
˝나,영화 사랑해도 되나˝

<YMCA야구단> <로드무비>, 그리고 <바람난 가족>. 개봉한 두편의 영화와 이제 곧 촬영에 들어갈 한편의 영화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 지난 1년 사이 충무로의 시야에 새롭고도 친근한 얼굴로 떠오른 황정민의 행보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대학로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지하철 1호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 스타> 등의 뮤지컬과 연극을 거쳐 ‘지상 최대의 오디션’에서 임순례 감독에게 발탁된 게 2000년 가을. 황정민은 꽤 바쁘게 달려왔다. 지난해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는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고백 한번 제대로 못하고 친구에게 선수를 빼앗기는 삼류밴드의 드러머 강수로 숫기없고 순박한 인상을 남겼고, 최근에는 강수 못지않게 순박한 <YMCA야구단>의 광태로 출연했다. 귀밑까지 내려오는 머리에 동그란 안경, 천진한 모범생 같은 광태는 친일파든 어쨌든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극진하고 마냥 사람 좋은 인물. <로드무비>에서는 동성을 사랑해서 가족도, 세상도 등진 채 부랑자로 살아가는 대식으로 분해 몰락한 증권 딜러 석원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쏟는다. 이성애주의적인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그의 사랑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면, 황정민이란 배우의 진심 어린 눈빛도 한몫했음이 분명하다. 10월28일 크랭크인할 예정인 신작 <바람난 가족>은 제목 그대로 구성원들이 불륜에 탐닉하는 가족의 이야기. 임상수 감독과 영화 얘기를 나누다가 “발동이 걸려서” 날이 밝도록 술잔을 기울였다면서도, 황정민은 약속시간인 오전 11시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YMCA야구단> <로드무비> 그리고 곧 크랭크인할 <바람난 가족>까지, 올해만 3편째다. 1∼2년 사이 아주 바빠진 것 같은데.

작품운이 있는 편인 것 같다. 배우가 작품을 만나는 것도 복인데. 솔직히 내가 보기에 나는 아직 썩 좋은 배우가 아니다. 열심히 하는 것뿐이지. 그저 이제 시작인데, 좋은 배우, 나쁜 배우 따질 것 없이 열심히 하는 수밖에. 계속 이렇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내가 판단할 게 아닌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어도 부르지 않으면, 쓰이지 않으면 그만인 거다. 지금도 어머니는 항상 기회는 두번 안 온다, 인상 쓰지 말고 웃어가며 열심히 하라고 하신다.

부모님도 영화를 보시나.

<와이키키 브라더스>도 보고, 최근에는 지금 사시는 문막 동네분들과 원주까지 가서 을 보셨다. 영화 끝나고 막걸리 한 잔 하고 있다고 전화하셔서는 이장님도 바꿔주고 그러셨다.(웃음) <로드무비>를 보시면 기절하시겠지. 신문에서 기사를 보셨는지, 섹스신도 했니 어떡하니, 벗었냐 하시며 걱정하셨는데.

아무래도 이성애 중심적인 시선이 강한 문화에서 <로드무비> 출연을 결정하는데 부담이 있었을 것 같다.

부담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어차피 동성애 이야기라서 <로드무비>를 한 게 아니니까…. 주인공이니까 했지. (웃음) 농담이고, 그것도 물론 없잖아 작용했겠지만, 겉으로 쉽게 드러내지 않는 대식이란 인물의 감정상태가 좋았다. 사랑이란 말을 끝까지 아끼면서 속으로 고민하는…. 그리고 “나 너 사랑해도 되냐”라고 말하는 마지막 대사에 끌렸고.

대식이란 인물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촬영 내내 나는 대식이라고, 대식을 많이 안다고 스스로 설득하면서도, 연기를 하는 순간순간 이게 정말 대식일까 되묻곤 했다. 하늘에서 떨어지기를 넌 여자만 보고 살아라, 그렇게 살아온 내가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영화를 찍고 나니 조금은 이해한 느낌이다. 다 안다고 할 순 없겠지만, 대식이란 인물과 길을 같이 걸어갈 수 있는 정도. 어차피 부모도, 가장 가까운 여자친구도, 서로 다 알 순 없는 것 아닐까. “나 너 사랑해도 되냐”, 느끼할 수도 있는 대사지만 굉장히 솔직해지면 통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직위나 조건을 떠나서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은데, <로드무비>는 그냥 사람 그 자체를 보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좀더 솔직해질 수 있게 한 영화다.

개봉이 다가온 지금, 관객의 반응에 대한 부담은 없나.

뒷일을 고민했다면 하지도 않았을 거다. 내 손을 떠난 일이다. 감독 손도 떠났고. 보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정말 느끼해, 재수없어, 그래도 할 수 없는 거고. 어느 영화잡지에서 게이 동호회 사람들을 모아서 토론한 걸 봤는데, 비판적인 시선이 많았다.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들을 알기 위한 교습서라고 했던가 적절한 말이다. 그 친구들의 시각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로드무비>는 사랑이라는 커다란 주제 아래 동성간의 관계를 다룬 이야기다. 동성애자 입장에선 같잖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성애를 대변하는 영화도 아니고,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YMCA야구단>이나 <로드무비>는 신인 감독들과 작업했는데, 어땠나.

김현석 감독은 영특한 사람이다. 지지부진한 걸 싫어해서 현장에서도 포기해야 할 부분을 잘 쳐내는 편이라 배우들이 편했다. 입봉하는 감독 맞나, 나중엔 오히려 우리가, 그래도 한번 더 찍어봐야 하지 않나, 그랬다. 첫 가편집본이 120분이었다니, 거의 자를 게 없었다고 들었다. <로드무비>는 감정의 흐름을 맞추느라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고, 오래 찍었다. 16mm 필름이라 값도 좀 쌌을 테니까…. 김인식 감독은 집념의 사나이다. (웃음) 나중에 35mm로 블로업하지 않고 디지털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필름 전체에 스크래치가 났는데, 한 프레임, 한 프레임씩 다시 손봤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때는 영화가 처음이라 긴장이 많이 됐다고 했는데, 3편을 찍고 난 지금은 어떤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는 사람들이 내 연기를 보면서 불편해하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좋게 봐줬다. 나도 영화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준 영화다. <YMCA야구단>은 영화란 작업이 이렇게 즐겁구나 하는 느낌을 줬고. 워낙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찍은데다 연극하던 동료, 선배들이 많아서 죽이 잘 맞았다. 밥때가 되도 먼저 먹는 게 아니라 서로 기다려주고. 같이 연기하는 동료들이 그렇게 챙겨주는 게 참 고마웠다. <로드무비>를 찍고 난 뒤에는 뭔가 포용력이 생겼달까. 누구나 한 발짝 앞으로 가려고 버둥거리면서 사는데, 뒤로 한발 물러나는 것도 괜찮겠다는 느낌.

연극무대와 다른 영화의 매력이 있다면.

사람들이 많이 보러 오니까 좋다. 학전에서 몇년간 <지하철 1호선>을 했는데, 총관객이 1만명 든 날 파티하고 그랬다. 그런데 영화는 하루에 몇십만명도 든다. 그들이 내 연기를 보고 얘기해준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영화한다고 돈도 받고, 관객이 돈 내고 보러 와주고, 잘했다고 칭찬도 해주고. 물론 화낼 때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기다, 아니다, 끊임없이 얘기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최고의 직업이다. 직장 다니는 분들한테 미안할 정도다. 또 영화는 연극적인 디테일과는 다른 디테일이 강하고, 내가 공부할 부분이 많아서 좋다. 이를테면 클로즈업으로 치고 들어오는 경우, 손끝 하나로 감정을 표현해볼 수 있다. 머리털에서부터 발끝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신경이 쓰인다.

예전에 중학교 때 <피터팬>을 보고 연기를 하겠다고 맘먹었다고 했는데.

본격적으로 생각한 건 계원예고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쓰던 사투리도 연극에 지장이 있다는 걸 알고 발음 정확한 초등학생 꼬맹이들한테 국민교육헌장 읽으라고 시켜서 녹음한 것 따라해가며 고치고. 열여섯, 열일곱 무렵, 친구들이랑 포장마차에서 연극사, 예술은 무엇인가 등등에 대해 뭐 그리 할 말이 많았던지... 무슨 얘길 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뭔가 진실했던 것 같은 그때의 마음이 아직도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 아닐까 싶다.

<바람난 가족>은 어떤 영화인가.

시나리오 처음 봤을 때는 사실 제대로 감이 안 왔다. 마누라도, 남편도, 엄마도 바람피우는 가족이라니. 그런데, 살다보면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다. 내가 맡은 주영작이란 변호사도 이 사회에 많이 있는,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다. 한국 남자들은 사실 자기 얘기를 리얼하게 잘 안 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선 한다. 마누라한테 못 하고 애인한테 하지만. 그 리얼한 얘기에 관객의 폐부를 찌르는 말들이 있다. 그래서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로드무비>에서 나름대로 솔직해지려고 애썼는데, 그래도 가식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바람난 가족>에 기대가 크다. 더 솔직하게 까발리고, 더 자연스러워지려고 한다. 솔직하다는 점에서 황정민이란 배우의 유서 같은 영화랄까. 죽기 전에 쓰는 유서에 거짓말을 하겠나.

개런티는 많이 올랐나.

많이 올랐다. (웃음) 처음에 비하면 6배쯤 그걸로 IMF 때 집에서 진 빚을 열심히 갚고 있다. 솔직히, 살면서 돈은 중요하지 않다. 대학로에서 연극할 때는 연봉이 200만원도 채 안 됐다. 한달 월급으로 12만원을 받았는데, 지금이야 하루 술값으로 나갈 수도 있는 돈이지만, 그때는 또 그걸로 충분히 살았다. 지하철 정액권 2장 사고, 교보문고 가서 볼 책 5만원어치 사고 나면 든든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신나게 술 마시고. 술 마시다가 극장에서도 자고, 친구집이나 근처 혜화 대중사우나에 가서도 자고. 그 사우나에서 자고 일어나보면 주위에 뻗어 있는 사람들도 다 대학로 선배들이었다. 우리 제발 여기서라도 좀 보지 말자, 그러면서도 거의 매일같이 봤다.

<바람난 가족> 외에 다른 계획이 있다면.

계획은 아니고… 최근 <헤드윅>을 정말 재밌게 봤다. 하이퍼텍 나다에서 하루 2회밖에 상영을 안 하기에 6시간인가 기다려서 봤는데, 음악도, 이야기도, 끝내줬다. 언젠가 그런 작품을 꼭 해보고 싶다. 아는 사람들한테 그런 작품 기획할 생각없냐고 부추기는 중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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