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몰입이라는 이름의 카타르시스, <에이리언2>
2001-04-11

영화에 빠져서 현실을 잊는 사람들, 비디오 테이프 10개를 대여해서 밤을 새면서 보는 사람들, 소파에 누워서 케이블TV의 영화를 하염없이 보는 사람들, 대체로 특별히 이야기할 만한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영화는 심심함을 잊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영화에 빠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심심한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조금은 한가한 말인지 모르지만, 궁핍하단 것이 견디기 어려운 점의 하나는 심심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자리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사회에 대한 소속감을 엷게 만들고, 주위와 어울리는 일을 힘들게 만든다. 어릴 때 학교에서 돌아와 마주한 집 앞의 적막함이 주던 현실감의 증발을 커서도 느낀다는 것은 단적으로 심심하다는 말이다. 마루를 같이 써야 하는 셋방의 이웃들과의 ‘강제된 친밀성’도 역시 즐거운 일은 아니다. 영화에 대한 주요한 수요가 하층계급에서 나오던, 영화사의 초기에 그랬듯이 영화관의 어둠은 빛이다. 현실 생활에서 영화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두운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어둠이 끝나는 터널 끝의 빛을 보는 일이다. 영화관의 구조, 정신분석학적 관객 이론, 카메라와 스크린의 이데올로기적 장치 등등의 이야기는 이 빛 앞에서는 모두 바래버린 얼룩조차 되지 못한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에이리언2>를 본 것은 별로 맡겨진 일이라는 걸 갖지 못하던 시간강사 시절이었고, 신혼 초였다. 결혼해본 사람은 다 알지만, 이 시기도 심심하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에이리언2>는 말이 필요없었다. 몇년이 지난 뒤에, 미래의 자본주의에 대한 묘사, 감춰진 상징적 장치, 미장센의 성적배치 등에 대해 들었지만, 그 영화가 준 것은 몰입의 체험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동시상영관에서 두번을 더 보았다. 그 극장은 친절하게 좌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중 목욕탕에서 깔고 앉는 데 쓰는 조그마한 플라스틱 의자(?)를 주었다. 배급받은 그 의자를 들고, 맨 앞 좌석과 스크린 사이에 있는 공간에 가 앉아서, 다시 몰입할 수 있었다. 뒤에 취직을 해서 VTR을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테이프로 빌려 보았고, 명절 특선영화로 텔레비전에서 방영할 때도 빠뜨리지 않고 보았다.

그때의 몰입의 이유를 사후적인 가감없이 말한다면, SF영화 일반이 주는 비현실성, 즉 여기와 지금이 아닌 다른 공간, 시간에서의 사건이라는 점이 있다. 그러면서도 여늬 SF영화의 미래와는 달리, 현재로부터 많이 발전된 것 같지도 않은 우중충한 미래의 모습이었다. 그것이 아마 어떤 면에서는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눈을 끌어당긴 것은 영화에 나오는 빛들이다. 시작할 때 리플리가 잠들어 있는 우주선 내부를 검사하는 빛, 수없이 나오는 모니터들의 빛, 전체적으로 너무나 어두운 영화 전체에 걸쳐서 끌어당기는 것은 그 빛들이었다.

만일 고전이라는 것이 특정시기에 국한되지 않고 언제나 매력을 느끼게 만드는 작품을 말한다면, <에이리언2>는 고전이다. 물론 지금도 그 영화가 매력적인 까닭은 그 엄청난 힘을 가진 에일리언을 화물운반용의 작업로봇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는 해피엔딩에 있다

어차피 산다는 것은 표현하는 일이다. 심심한 사람도 심심함을 표현하면서 산다. 그런 의미에서 산다는 것은 가시화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가시적인 것과 과시적인 것은 다르지 않을까. 에일리언이 끔찍한 이유는, 그것이 내부에서 외부로의 표현이 극단적인 과잉에 달한 존재라는 점이다. 점액은 몸의 내부에서 만들어져서 외부로 분비된다. 에일리언의 경우 점액은 피부 전체를 덮고 있을 뿐 아니라 과도하게 흘러넘쳐 언제나 자신의 흔적을 여기저기에다 묻혀 놓는다. 자기 표현, 자기 과시의 엄청남. 그중 입이 특징적이다. 입이 벌어지면 단순히 속살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입 속에서 나온 또다른 두 번째 입을 볼 수 있다. 입을 통해서 자기를 이중삼중으로 과시한다. 그것을 넘어서서 에일리언은 상처를 입으면 강산성의 피를 흘린다. 자신의 약점, 상처로도 상대방을 제압한다. 자신의 약점과 비루한 속내까지도 고백함으로써 힘을 과시한다. 이러한 자기과시는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 존재의 생존본능이다. 그래서 도덕적 잣대나 논리적 반론은 어떤 처방도 되지 못한다. 그 존재의 문제는 그것이 언제나 무엇인가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면서 그 대상을 숙주로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엽기의 시대에는 최고의 스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업로봇은 그저 노동수단일 뿐이다. 로봇은 자기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리플리는 자기라는 것이 없는 두툼한 기계의 안쪽에 숨어 있다. 로봇이든 리플리든 자기과시와는 거리가 멀다. 리플리가 착용한 로봇은 원래 전투용이 아니라 그저 운반용이다. 또 한가한 말이겠지만 로봇이 에일리언을 이겨서 정말 다행이다. 그 결말이 <에이리언2>를 여전히 좋아하게 만든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글: 박성수/ 부산해양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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