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하얀방> 끝내고 <천년호> 촬영준비 완료 , 정준호
2002-11-06
글 : 최수임
사진 : 정진환
5년뒤,감독으로 만날까요

정준호에게는 능글맞은 구석이 있다. 수줍고, 어둡고, 조심스러운 구석은 없다. ‘남자라면 그렇게 시원시원해야지’ 하고 ‘어른’들이 말할 법한, 그런 개의치 않아하는 시원스러움이 그에게는 있다. <하얀 방> 기자시사회에서 정준호는, 그런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배우와 감독의 무대인사 시간. 사회자가 뭐라고뭐라고 얘기를 하려 하는 어느새, 정준호는 마이크를 잡고 능수능란하게 사회를 봐‘버렸다’. ‘뭐, 힘들 게 할 필요 있어’ 정준호는 그런 말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 같다.

<하얀 방>은 정준호의 여덟번째 영화다. 지난 7월 촬영이 끝났지만 개봉이 늦어져 <가문의 영광>보다 늦게 관객을 만나게 됐다. <가문의 영광>으로 ‘영광’을 본 이후 후속작이 된 <하얀 방>의 개봉에 맞춰, 정준호는 중국 <천년호> 촬영장에서 며칠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어떻게 하다보니 세편이 연달아 나오게 됐네요”, 라고 숨가쁨을 드러냈다. 특정한 어느 사이트에 접속한 사람들이 속속 죽어버리는 의문의 연쇄 사건을 수사하는, 사이버 수사대의 젊은 형사. <하얀 방>에서 정준호는 스릴러 호러 영화의 스탠더드 캐릭터라 할 만한 ‘형사’의 옷을 입었다. <가문의 영광>의 박대서로, 한껏 물오른 코믹 연기를 했던 것이 무색하게, 웃음기라곤 하나 없는 건조한 인물이다. 어떤 게 더 정준호에게 편한 옷일까. “배우에게는 누구에게나 잠재된 능력이 있지요. 어떤 작품을 통해서 보여지느냐의 문제이고, <가문의 영광>은 저에게 그런 능력을 끌어내는 작품이었습니다”라고, 그는 짐짓 돌려말한다.

사실, <두사부일체>를 하겠다고 할 때만 해도, 정준호는 주위에서 ‘그런 영화 하지 마라’는 충고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잘 되면 괜찮은데, 잘 안 되면 괜히 이미지만 망치는 거 아니냐는 얘기였죠. 저한테는 모험인 셈이었어요.” 그런데 그 모험이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두고, 결국 <가문의 영광>이 그뒤를 이어 그의 이미지를 ‘코믹’쪽으로 아예 자리잡게 했다. <하얀 방>은, 이제 그렇게 달라진 상황에서 내보이는 작품이라, 그에게 또 하나의 모험일지도 모른다.

“정준호씨가 나오는 신이 왜 그렇게 적어요” <하얀 방>을 본 사람들한테서 제일 많이 듣는 말이 이거라고, 그는 말했다. <하얀 방>은 이은주, 정준호 주연의 영화이지만, ‘사이버수사대 25시’를 취재하는 비디오 저널리스트 이은주가 압도적으로 주연이라고 하는 것이 맞고, 형사 역의 정준호와 방송국 앵커 역의 계성용이 골고루 조연으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흑수선>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가문의 영광>, 요즘 찍고 있는 <천년호>까지 내리 주연만 하고 있는 그가, 이런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생일파티를 열 수도 있지만 생일파티에 초대받을 수도 있는 거죠. 영화는, 늘 주인공만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본격적인 주연이라고는 못해도, 정준호는 <하얀 방>의 캐릭터를 위해 하나의 전략을 세웠다. “형사 같지 않은 유한 형사, 실제 사이버수사대 형사 같은”이 그의 컨셉. 실제 사이버수사대의 형사를 소개받았는데, “형사가 아니라 모범생” 같은 인상이더란다. 사이버수사라는 업무특성상 육체적인 어려움은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범인과 두뇌플레이를 하는 심리연기를 하는 게 힘들었다고. “그런데, 영화 하면서 생각 너무 많이 하는 건 안 좋은 거 같아요. 매너리즘에 빠지거든요. 생각을 너무 안 해도 주관이 없게 되지만….” ‘유한 형사’라는 큰 줄기를 세운 뒤 예의 그의 스타일대로 ‘쓱쓱’ 해나갔다는 얘기다.

정준호가 어떻게 연기자로 데뷔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MBC 공채라는 설도 있고, 골프장에서 아르바이트하다 어떻게 됐다는 설도 있고…. 다 맞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등학교 2학년, 어느 해수욕장으로 연결된다. “그때 제가 무전여행을 했거든요. 어느 해수욕장에서 돈이 다 떨어졌었는데, 그때만 해도 무명이었던 표인봉, 전창걸, 박용기씨가 저한테 돈을 주었어요. 나중에 대학교 때 골프 선수가 돼 볼까 하고 골프장에서 주경야독을 할 때 에이전시에 있는 어떤 분이 저한테 패션모델로 데뷔하게 해줄테니 사진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사진을 드리고 나서 갑자기 옛날에 만났던 형님들이 생각나는 거예요. 찾아갔죠. 그래서 대학로 극단에서 연극을 시작했어요. 3년 동안 연극하고 모델을 하다가 MBC 탤런트로 들어갔습니다.” 무전여행중의 고등학생에, 골프선수 지망생에, 난데없이 7년 전 만났던 ‘형님’들에, 그의 ‘데뷔기’에는 여러가지 이질적인 요소들이 섞여 있다. 도무지 ‘개연성’이 없는데, 그는 눈도 꿈쩍 않고, 예의 ‘힘들지 않게 그렇게 됐어요’ 하는 표정이다.

인터뷰를 한 다음날, 정준호는 <천년호> 촬영을 위해 중국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했다. <천년호>는 그가 진성여왕과 천민 소녀 사이의 삼각관계 애연에 휘말리는 장군 ‘비하랑’으로 출연하는 역사멜로영화. 1월말까지 중국에서 장군 옷을 입고 말 위의 액션에 몸을 맡기고 난 뒤, 그는 미국에서 1년쯤 영화연출을 공부한다는, 상당히 파격적인 계획을 갖고 있다. “배우가 아무리 한다고 해도, 역시 자기 하고 싶은 얘기 화면에 담을 수 있는 건 감독밖에 없더라고요.” 이렇게 거침이 없을 수가. 정준호가 앞으로 3년뒤, 5년뒤 어떤 일을 꾀하고 있을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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