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오슨 웰스 회고전 마련한 게리 그레이버 인터뷰
2000-12-29
글 : 김혜리
사진 : 오계옥
“오슨 웰스는 나의 아버지”

1970년 여름.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와 영화인의 서툰 첫발을 내딛던 한 청년이 그의 영웅 오슨 웰스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영화인 게리 그레이버의 인생에서 가장 큰 빛과 생기로 충만했던 15년은 그렇게 동화처럼 시작됐다. 200편의 영화를 찍고 20여편을 연출한 지금도 게리 그레이버는 세계 최고의 오슨 웰스 마니아. 개인 아카이브에 수집한 웰스의 필름을 들고 러시아부터 아르헨티나까지 가지 않은 곳이 없고, “지금도 영화를 찍을 때면 매번 오슨은 내게 조언을 준다”고 말하는 그의 눈가 잔주름에는 첫사랑에게나 바칠 법한 맑은 그리움이 금세 차올랐다. 현재 그레이버는 웰스와 그가 함께 만든 미완성된 첫 영화 <바람의 저편>(1975)의 완성을 미국 케이블 채널의 도움을 받아 추진하고 있다.

-오슨 웰스에 대한 상식 중 당신이 아는 진실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은.

=사람들은 그가 스케줄과 예산을 마구 초과하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슨은 100만달러 이상의 영화는 만든 적도 없고 돈에 대해 매우 신중했다. <시민 케인>의 예산 초과는 영화의 위대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멋대로 예산과 일정을 넘겨도 별말을 듣지 않는 요즘 감독들을 생각해보라. 그를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긴 제작자들의 견해는 옳았다. 촬영, 연기, 각본, 연출, 조명, 음악까지 오슨은 누구보다 많이 알았으니까. 할리우드는 배우로서의 그는 좋아했지만 감독으로서는 신뢰하지 않았다.

-웰스는 농담과 마술을 좋아한 장난꾸러기였다는데.

=언젠가 못된 제작자가 한명 있었는데, 웰스는 배우 하나를 고용해 의사로 변장시킨 다음 호텔로 가 그 프로듀서에게 전염병이 돌아 호텔이 봉쇄됐다고 으름장을 놓게 했다. 겁먹은 제작자는 6일간 방 안에서 꼼짝도 못했고 그동안 오슨은 자기 맘대로 했다. 나와 오슨은 그런 장난을 ‘저질 코미디’라고 부르며 즐겼다. 오슨은 광대, 스트리퍼 등 소극(burlesque 笑劇)의 연기자들을 <스트레인저> <악의 손길>에 기용해 좋은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크게 절망한 웰스의 모습은.

=누군가 그의 삶과 영화에 대한 악담을 쓰면 오슨은 며칠이나 우울해 했다. <시민 케인>에서 그의 기여도를 의심한 폴린 케일의 책이 나왔을 때나 <뉴욕 타임스>가 <시민 케인> 이후 그가 좀더 거창하고 훌륭한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재능을 낭비했다고 썼을 때, 오슨은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낭비라니! 그는 언제나 뭔가를 쓰고 찍고 발명했다. 오슨의 영화는 모두 다른 식으로 걸작이었다. 그는 <시민 케인>을 반복하는 대신 작품마다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고 지나간 영화에 대해 말하기 싫어했다.

-<거짓과 진실>에서는 잠깐 단역으로 등장도 했던데.

=<거짓과 진실>은 나와 오슨 둘이서 만들다시피했다. 나는 촬영, 음향, 운전, 연기, 커피타기까지 해야 했다. 오슨은 손닿는 모든 것을 활용했다. 한번은 독일 방송사가 그를 인터뷰했는데, 회견이 끝나고 조명을 철수하기 전 짧은 틈에 오슨은 나를 불러 카메라를 돌리게 했다. 결국 우리는 독일식 조명(German lighting)을 공짜로 써먹었다. (웃음) 대학에서 강연 부탁이 오면 오슨은 촬영 허가를 조건으로 수락하곤 했다.

-웰스는 일중독자였나. 촬영장에서는 어떤 스타일의 리더였나.

=일주일에 이레 일하는 워커홀릭이었고 덕분에 우리도 휴일없이 일했다. 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병드는 것이었다. 모든 병은 전염된다고 믿었던 오슨은 아픈 사람 곁에는 가려 하지 않았으니까. (웃음) 촬영도 철저히 자기 식으로 했다.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딱 붙어 지시를 하는 바람에 시가 불에 내 셔츠가 구멍이 나곤 했다. 앉아서 지시하길 즐겨서, 그가 화장실 간 사이 의자를 슬쩍 옮겨놓는 속임수를 쓰기도 했다. (웃음) 요구가 많았지만 자신에게도 깐깐했기에 불평할 수 없었고 모두 그를 사랑했다. 특히 배우들과 관계가 좋았다.

-오늘날 미국 영화인에게 웰스는 어떤 존재인가.

=모든 감독은 그의 영향권에 있다. <시민 케인>은 할리우드 시스템 내에서 창의적인 영화를 만드는 혁명의 시초였다. 그가 시작한 혁명은 계속됐고 지금은 디지털 혁명이 운위되고 있다. 오슨이 살아 있었다면 디지털영화에 손댔을 것 같냐고? 물론이다. 오슨은 이미 1984년에 <리어왕>을 시퀀스에 따라 각각 35mm와 비디오로 나눠 찍어 합성하는 시도를 했다.

-당신도 영화 만들기에 평생을 바쳤다. 오슨 웰스 같은 ‘거인’ 곁에서 한때를 보냈다는 사실이 어떤 여운을 남겼나.

=오슨은 내게 아버지와 같다. 스필버그, 론 하워드를 비롯해 많은 감독과 일했지만 오슨 같은 사람은 없었다. 오슨은 화내고 고함을 쳐도 좋았다. 재능이 있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대부분 감독들은 그런 존경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요즘은 아내와 함께 전세계를 돌며 디지털카메라로 <물에 빠진 여자>(Drowning Woman)라는 영화를 찍고 있다. 실직한 뉴스캐스터가 점점 영락해 정신병원에 앉아 전세계를 누비던 자기 모습을 다시 보는 이야기다. 서울 풍경도 영화 속에 등장한다. 이곳 서울에서도 나는 여전히 오슨과 함께 일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삶이다. 그에 비하면 영화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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