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기자’라는 타이틀의 명함을 내밀며 대스타를 만나고 촬영현장을 바쁘게 쫓아다니지만, 그 직업이 진짜로 해야 하는 일이 뭔지 도대체 모른 채 어리버리 지내던 ‘초짜 시절’, ‘내 인생의 영화 스승’께서 들려주는 세계 최고의 영화 얘기를 들으며 황홀경에 빠져 지내던 그런 시절, 우연히 눈앞에서 펼쳐지는 ‘삐자 암거래’(불법 복제 테이프의 음성적 주고받음)에 침을 꼴깍이던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인터넷만 가능하면 개봉이 멀고 먼 최신작들을 최상의 화질로 얼마든지 ‘불법 관람’할 수 있지만 나의 ‘그 시절’엔 어디 화질이 문제겠는가. 누군가 외국엘 다녀오면서 구해온 정식 프로테이프나 레이저디스크를 어떡해서든 복제 테이프로 만들어 가지고 있으면 그 자체로 ‘짱’이었다. 그런 상황에 코앞에서 오고가던 보물 중 내 인생의 병곡점이 된 ‘삐자’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였다.
한글도 아닌 <ベルリン天使の詩>라는 낯선 글자가 ‘워드프로세서’로(당시 기자들 최고의 필기도구. PC는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먼 미래였다) 출력되어 검은 테이프 위에 떡 하니 붙어 있으니 호기심에 불이 붙을 수밖에. 고마운 나의 영화 스승은 순순히 또 하나의 ‘삐자’(삐자의 삐자)를 만들어주셨다.
그때부터 내 앞엔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다. ‘베루리누’를 읽기 위해 가타카나를 공부하게 됐고, 일어가 읽히다보니 이 영화를 찬사한 일본의 영화잡지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생전 본 적도 없는 빔 벤더스라는 사람이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었다. 흑백으로 시작해 컬러로 끝을 맺어가는 동안, 천사에서 인간으로 변해가는 부르노 간즈의 연기는 내 심장 한 덩어리가 조금씩조금씩 식초에 절여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했다. 천사 다미엘과 카시엘은 세상 사는 일에 지쳐 있는 청년의 등에 손을 대고 그의 고통을 전해듣지만 청년이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가슴만 아파해할 뿐이다. 그것이 두 천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기 때문에. 천사보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도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다. 존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다미엘은 천사를 포기하고 인간을 선택한다. 자신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사람들에게 보이며 “빨간색 맞죠”라는 물음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을 웃는다.
누구는 이 영화가 독일의 통일을 갈망한 것이라고 하고, 누구는 이 영화가 인간 세상의 단절된 의사소통을 상징한 것이라고 했지만, 내게 있어 이 영화는 ‘세상은 살 만큼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인생의 스승’ 같은 의미였다. 베를린 하늘 위에서 인간을 내려다보며 죽음의 공포를 모르는 천사로 살기보다는, 더이상 날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고, 세상 속의 사람들과 똑같이 생로병사를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의무감처럼 영화를 분해하고, 습관처럼 영화를 비틀어 보곤하던 내게 <베를린 천사의 시>는 그렇게 아름다운 영상 언어로 내 팍팍하고 경직된 심장을 부드럽게 이완시켜주었던 것이다.
지금도 나는 이러저러해서 영화가 고프거나,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해 세상이 허무해지거나 하면 이 영화를 다시 보곤 한다. 아주 맛 좋은 반찬에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듯한 포만감에 식초에 절여져 있던 내 심장이 스르르 희석되어지는 기분 좋음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베를린 천사의 시>는 이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내 최상의 양식인가보다.
p.s. 이 자리를 빌려 그 시절 내게 <베를린 천사의 시>를 알게 해준 나의 영화 스승님께 큰 감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