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유치하니까 좋네, 그치? <가유희사>
2002-12-04
내 인생의 영화

새롭게 어딘가로 들어서는 순간은 항상 모든 것이 어색하고 산란스러운 것인지, 1995년 고등학교에 입학한 당시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새 교복의 다림질 자국만큼이나 빳빳하게 굳은 얼굴로 눈알만 매롱매롱 굴리고 있다.

그런 그때, 어리둥절함을 떨쳐버리고자 주변의 어색한 사람들과 나슨하게 ‘영화감상서클’을 만들었다. 사실 그때는 영화를 무지 좋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좀더 빨리 친해지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래도 딴에는 ‘영화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란 의미의 ‘Kino Kids’라는 서클명을 짓기도 했다. 당시 교칙상, 서클을 만들려면 지도선생님이 꼭 한명 있어야 했는데, 우리는 첫 수업시간부터 수업진행 보다는 영화에 관해 열변을 토했던 세계사 선생님을 지목했다.

선생님은 영화에 관심있어하는 우리를 아주 대견해하며 서클 모임 때마다 영화에 관한 자료들과 테이프들을 챙겨와 보여줬는데, 대부분이 우리가 접해보지 못한 영화사에서 대단히 손꼽히는 고전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를 앉혀놓고 네오리얼리즘이니, 표현주의니, 숏의 병치가 어쩌고, 푸도프킨이니 그리피스니 하는 당시로서는 수학공식보다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들을 꺼이꺼이 토해냈다. 선생님이 보여주는 영화들은 다 훌륭한 고전들이긴 했으나, 별로 특별할 것 없이 나부룩한 여고 1년생들이 보기에는 다소 벅찬 영화들이 많았다. 흑백의 무성영화 <잔다르크의 수난>을 보던 날은 어찌나 졸음이 쏟아지는지 아무리 눈을 아당지게 뜨려 해도, 목을 가누어보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이 졸았다가 눈을 떠도 희끈거리는 화면에는 매번 잔다르크의 사느라한 얼굴만이 클로즈업되어 있어서 내용 이해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무슨 의무인 양 선생님을 쫓아 그런 영화들을 열심히도 보러 다녔다. 제대로 이해는커녕 매번 졸아젖히면서도 말이다. 우리는 점점 선생님의 열정을 힘겨워하고 있었지만 선생님은 매주 새로운 영화들로 우리를 담금질했다.

그러던 어느 모임날!

선생님이 <시민케인> 테이프를 어렵사리 구하여 틀어주고는 급한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우리는 그 사이를 틈타 <시민케인>을 꺼버리고 한 친구가 빌려온 주성치, 장만옥, 장국영 주연의 <가유희사>라는 홍콩영화를 틀어버렸다.

<가유희사>는 한 집안 삼형제들의 좌충우돌을 담은 그야말로 홍콩식 코미디의 결정판이었다. 이 영화에는 당시 우리가 좋아하는 홍콩 최고의 배우들이 총출동했는데, 주성치, 장만옥은 물론, 장국영까지 그야말로 최고의 캐스팅이었다. 수많은 여자를 거느린 바람둥이 둘째아들 역할로 주성치가 등장하여 장만옥과 (말도 안 되지만) 환상적인 에펠탑 키스신을 펼치고, 셋째아들 역할로 장국영이 등장하여 <영웅본색>등에서 보여줬던 터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꽃꽂이를 열심히 하는 여성스런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세 배우들의 황당무계한 코미디 연기를 보면서 딥 포커스나 기호학 따위의 고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주성치가 나무에서 떨어진 새알을 맞고 기억상실증에 걸려버리는 뜬금없는 상황에서도, 모든 배우들이 갑작스레 말도 안 되는 가사의 노래를 합창하면서 춤을 춰도, 장만옥이 마돈나처럼 플라스틱 뾰족 가슴을 달고 슬로모션으로 등장을 해도, 시답잖은 스토리로 우당탕탕 어이없게 모든 상황들이 종료되어버려도, 우리는 그날 온몸이 날연해질 정도로 아주 신나게 웃으면서, 오직 영화만 봤다.

사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영화서클이라는 오만한 소속감과 의무감 때문에 각자의 그 ‘유치하고 망상스런’ 취향들을 스스로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뒤 우리는 선생님이 정해준 영화를 보다가 졸기보다는 우리 각자의 취향에 맞게 한껏 유치해지기로 했다.

지금도 가끔 솟구치는 열정으로 머리 아픈(?) 영화들을 볼 때면 주성치와 장만옥의 서커스 같았던 ‘에펠탑 키스’가 남상남상 떠오르곤 한다.

글: 오류미/ 서울독립영화제 프로그램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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