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보드웰,홍상수를 만나다 [1]
2002-12-14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정리 : 박은영
미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홍상수식 영화구조 탐문하다

“호기심만이 진정한 진정성의 근거라고 생각한다”

<영화예술> <세계 영화사> <영화스타일의 역사> 등 영화 연구 입문서를 비롯한 다양한 저서를 내놓은 미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 교수가 한국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씨네21>은 모종의 ‘공작’에 착수했다. 그것은 보드웰 교수와 홍상수 감독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이었다. 영화의 언어구조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온 ‘구조주의자’ 보드웰 교수가 남달리 눈여겨본 영화인 목록에 홍상수 감독이 자리해 있다는 사실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는 홍상수 감독의 내러티브와 비주얼이 보여주는 미학적 특성이 허우샤오시엔과 차이밍량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미니멀리즘 유파에 속해 있는 동시에 그 이상의 개성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세계 영화사>의 개정판과 그의 새로운 저서에 이러한 연구내용을 담아낸 바 있다. 지난 9월 공항 검색 강화로 비행기를 놓쳐 USC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불참한 보드웰 교수가 발표하려던 주제 또한 “홍상수: 아시아의 미니멀리즘을 넘어서”였다. 세밀한 분석가로 이름난 세계적인 영화학자, 그로부터 ‘사랑의 메스’를 받은 감독은, 따라서 늦게나마 서로 만나야 하고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었다.

부산영화제가 한창이던 지난 11월17일, 서울에 이어 부산에서도 강연이 예정돼 있던 보드웰 교수, 그리고 뉴커런츠 부문의 심사위원을 맡은 홍상수 감독을 어렵사리 한자리에 모셨다. 마침 이들은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고, 이 사실을 먼저 알았던 보드웰 교수가 자신의 새 저서 <세계 영화사> 개정판을 홍 감독 방에 선물로 남긴 뒤였다. 이에 홍상수 감독은 조선시대 화가들의 그림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담긴 두권짜리 <화인열전>을 답례 선물로 준비해 들고 나타났다. 그는 보드웰 교수에게 자신이 특별히 좋아한다는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을 펼쳐 보여주며, 영화의 영감, 그 원천에 대한 힌트를 흘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한 시간 남짓 얼굴을 마주한 이들은 엄청난 속도와 밀도로, 영화 만들기와 영화 분석에 대한 속깊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아시안 미니멀리즘을 넘어서

보드웰 | 어제 강연에서 나는 ‘아시안 미니멀리즘’을 이야기했다. 롱테이크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이뤄진 어떤 미학적 경향은 아시아영화에서 매우 보편화돼 있다.당신 영화의 미니멀리즘적인 특성으로 <오! 수정>의 무대화 방식을 예로 들어보면, 한 여자와 두 남자가 함께 앉아 술 마시는 장면이 있다.재훈이 자리를 뜬 다음 수정이 그 자리로 옮겨 앉고 나서, 옆에 있던 두 남녀가 화면의 전면에 자리잡게 되는 상황부터가 흥미롭다. 그 남자와 여자는 메인 캐릭터들의 메아리처럼 그들의 행동을 모방해 보이고 있다.영수가 수정에게 술 마시기를 강권하고 있을 때 앞에 앉은 여자가 코냑병을 기울인다.난 늘 궁금했다.이런 장면을 구상할 때 사전에 얼마나 계획하고 또 얼마나 우연에 의존하는지.

홍상수 | 신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 중 몇개는 촬영 전에 이미 결정되고 나머지는 촬영 중에 현장에서 만들어진다.그리고 그렇게 의식적으로 선택된 요소와는 다른 종류의 요소들이 촬영 중에 만들어져 영화 속에서 어떤 일관성을 갖고 존재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은 촬영 직후에 모니터링과 편집 중에 발견하게 되고,그때 그곳에 놔두느냐 아니면 버리느냐, 하는 선택의 과정을 거친다. 이런 무의식적으로 컨트롤되는 요소들이 신 안으로 들어와 자기 자리를 잡게 되는 과정은 언제나 내게 약간은 신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그것은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우연보다 훨씬 많은 우연의 중첩과 깊은 저층에서 어떤 목적을 가진 힘이 요소들간의 연결을 의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현상이다. 어쩌면 이런 요소들이 의식적으로 집어넣는 요소들보다 내가 더 비밀스럽게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특히 배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런 종류의 요소들은 가장 가치있게 받아들여진다.

보드웰 | 숏을 어떤 순서로 구성하는지도 궁금하다.배우들의 위치를 정한 뒤에 카메라 포지션을 정하는 것인가, 아님 카메라 포지션을 정한 다음에 배우들의 위치를 정하는 것인가.

홍상수 | 카메라 포지션을 먼저 정하는 편이다.그런 다음에 연출부들이나 스탭들을 대역으로 해서 정확한 움직임을 결정한다.배우들은 다른 곳에서 리허설을 거의 마치고 마지막 순간에 카메라 앞으로 데리고 나온다.배우들이 카메라 앞에 섰을 때는 이 테이크가 단 한번의 테이크라는 느낌을 갖도록 최대한 배려하려고 한다.

보드웰 | 그러려면 테이크를 많이 가진 않겠다.두세 테이크 정도.

홍상수 | 일반적으로 서너번 정도의 테이크를 가고, 어떤 경우는 열번 넘게도 가는 것 같다.연기의 선도는 테이크가 갈수록 당연히 떨어진다.그러나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다른 요소들, 꼭 타이밍이 맞아야만 맛이 나는 요소들, 연기의 신선도와 상관없는 이런 요소들 때문에 테이크가 많아지는 경우가 꽤 많다.

보드웰 | 차이밍량이나 허우샤오시엔처럼 당신과 비슷한 감독들의 경우, 모두가 작은 디테일에 충실한 것 같다.이런 방식의 장점은 신을 리얼타임으로 전개해 나간다는 것인데, 그러고는 배우의 작은 제스처와 사물의 작은 디테일을 통해 이야기를 채워나간다.<강원도의 힘>의 금붕어 장면이나 서로 술을 따라주는 장면이 그렇다.당신은 캐릭터들의 상호관계를 통해 디테일을 풍부하게 발전시켜 나가는데, 그런 부분들은 아까 말한 리허설의 연장과도 같은 촬영 방식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인가.

홍상수 | 영화 만들기의 전 과정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작은 발견들이 이루어지고, 그것들이 계속 전체라는 구조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과정인 것 같다.

보드웰 | 당신은 배우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카메라를 고정해놓고 촬영하는 경우가 많다.이런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들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세밀히 관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교육적이라고 생각한다.미국영화, 심지어 유럽영화를 둘러봐도, 그렇게 배우들이 자신을 드러내도록 기다려줄 만큼의 인내심이 엿보이는 예는 없다.

홍상수 | 한신에 10가지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그중 적어도 3∼4가지는 모든 관객이 관람 중에 꼭 알아차려야 하는 요소일 것이다. 나머지는 관객이 누구냐, 그 한 관객의 그 순간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그러나 이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도 그런 관객의 의식의 필터를 피해서 스며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은 3∼4가지보다 많은 요소들이 다수의 관객에게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드웰 | 맞는 얘기다.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감독들은 모두가 알아볼 수 있도록 중요한 포인트는 명시하는 동시에 일부는 이해하고 또 다른 일부는 그렇지 못할 작은 디테일들을 함께 배치한다.내가 당신의 영화나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서너번씩 반복해 보길 즐기는 이유는 처음 볼 때 모르던 것들이 다시 볼 때는 보이기 때문이다.나는 이것이 시야를 넓게 잡은 화면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숏 속에 많은 것들을 담아내 단번에 볼 수 없는 요소들도 다시 보면 보이게 하는 그런 장치 말이다.

진행: 김혜리 verme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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