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희는 깔끔한 사람이다.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못 하는 것을 깨끗하게 가린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필모그래피는 지금보다 훨씬 많거나, 적어도 한편은 더 많을 것이다. 인터뷰 시작 전 커피를 권했을 때 지진희는 “아니요”라고 조용히 거절했다. 커피는 원래 마시지 않는다면서. “커피는 향과 맛이 달라서 이중인격 같아요. 향은 달콤하지만 맛은 쓰잖아요.” 그리고 그는 녹차를 마셨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주관이 뚜렷하고, 커피의 향과 맛을 분리해 느낄 정도로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라는.
지진희는 6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연기자가 된 경력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보통 직장인의 생리를 알 대로 다 안 뒤, 전혀 다른 세계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회사원으로서 지진희가 한 일은 디자인과 광고사진 촬영이었다. 어느 날 건너건너 아는 (그러니까 거의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연기자 데뷔를 권유받았고, 그는 마치 커피를 거절하듯 거절했다고 한다. 얼마 뒤 그가 회사로 찾아와 “한달 동안 매일 회사로 오겠다”며 ‘종용’을 시작했을 때, 그는 ‘1년 안에 성공할 수 있겠냐, 그러면 하겠다’는 조건으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IMF로 회사에 정리해고 바람이 불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가족도 있고 제가 젊은 편이라서 제가 나와줘야겠다고 생각한 바로 다음날, 그분이 찾아오셨더라구요.” 지진희에게 연기자 데뷔는 일종의 ‘새로운 직업 찾기’였다. 디자인을 하다 사진으로 옮겨갔듯이.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그에게는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재수의 난> 오디션에는 (매니저의 말만 믿고) ‘월차를 내고’ 그냥 박광수 감독과의 인사자리인 줄 알고 갔다가 “못하겠습니다”라는 말만 하고 내려왔고, 그랬는데도 카메라 테스트 결과가 좋다며 합격되자 “왜 나를 뽑았냐.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했다. 그러다가 처음 하게 된 것이 황인뢰 감독이 연출한 조성빈의 뮤직비디오 <삼류 영화처럼>. 이후 <여비서> <줄리엣의 남자> 등 드라마에 출연했고, <H>는 그의 첫 영화다.
원래 지진희는 <살인비가>에서 한 형사 역을 맡게 돼 있었다. <H>에서 한 형사는 시작하자마자 자살하는데, 반면 <살인비가>는 <H>의 전사격인 이야기로, 한 형사가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며 신현과 대결하는 과정을 죽 그린다. <살인비가> 시나리오는 크랭크인 몇달 전 <H> 로 바뀌며 거의 다른 이야기로 탈바꿈했다. “전 열심히 <살인비가>의 한 형사 역을 준비하고 있었죠. 갑자기 <H> 시나리오를 받고는 ‘아, 내가 연기가 안 돼서 비중을 확 줄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사에 슬쩍 ‘일찍 죽더라구요’ 하자 그제야 ‘한 형사가 아니라 강 형사야’라는 말을 들었죠. ” 연쇄살인범 신현이 자수하고 이를 담당했던 한 형사가 자살한 1년 뒤 발생한 비슷한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강 형사. 지적이고 정적인 성격의 한 형사에 비해 강 형사는 감정적이고 다혈질이다. 갑자기 달라진 캐릭터임에도, 지진희는 충실히 제 역할을 해냈고, 전형적이면서도 그만의 질감이 살아 있는 연기를 해보였다.
빨리빨리 조금이라도 더 많이 무엇인가를 하려는 연예계에서, 지진희는 유달리 속도에 관심이 없는 배우인 것 같다. 급할 게 뭐가 있냐는 듯. 하지만 그도 “언제나 긴장하며 배우로서의 자신을 관리하고 있”기에 가능한 여유일 것이다. 지진희는 올해 안에 박광수 감독이 연출하는 단편 <인물값>(인권영화 프로젝트 중 한편)을 찍을 예정이고, 언제 시작될지 모르지만 역시 박광수 감독의 <방아쇠>에도 캐스팅돼 있다. “못하겠습니다”하고 그냥 내려와버렸던 <이재수의 난> 오디션 무대 위의 그와 지금의 그는 많이 다르면서도 비슷할 것이다. 박광수 감독이 그를 ‘쓰는’ 것은 좋아진 연기력보다 어쩌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지진희의 진실한 그 무엇 때문이 아닐까. 배우가 되기 전 <천국보다 낯선>을 본 이후 짐 자무시 마니아가 되어 자무시 영화라면 쫓아다니며 다 봤다는 지진희.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일까. 언뜻 그가 자무시 영화 같은 작품에도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인터뷰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