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FM <세계음악기행>을 맡으면서 서남준씨를 알게 됐다. 그리고 음악, 영화, 프랑스 유학 등 내 삶의 몇 가지 동기가 되어준, 학창 시절의 FM 영화음악 프로그램의 작가가 바로 그분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러자 많은 기억들이 샘솟기 시작했다.
십년 전 유학 시절, 기자 어시스턴트로 칸영화제에 내려갔다. 종일 붙어다니며 하루에도 네댓 작품을 봐야 하는 일정이었다. 며칠이 지난 아침, <엘 비아헤>를 봤다(El Viaje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 1992, 아르헨티나). 팔레 데 페스티벌을 나오면서 나는 양해를 구하고, 당일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혼자가 됐다. 더이상 다른 영화를 볼 수가 없었다. 그날 하루만큼은 라틴아메리카의 자연과, 현실과,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 대륙을 종단하는 그 청년의 마음을,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음악에 실어 고스란히 간직하는 데, 그 무엇으로부터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행복했다.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아버님이 카세트라디오를 사주셨다. 자연스럽게 영화음악에 매료되었다. 이야기가 있는 음악이었다. 내가 본 영화보다는 그렇지 않은 게 훨씬 더 많았고, 그런 음악과 대사를 들으면서, 또 그 영화 얘기를 들으면서 장면들을 하나하나 그려보곤 했다. 음악으로만 들으면서 상상했던 영화를 직접 보게 될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집 나간 어린 마르코에게 수화기 너머로 울부짖는 엄마의 목소리가 담긴, 스텔비오 치프리아니의 <눈물의 전화> 트랙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별이 된 소년>이 그랬고 (Gli Ultimi Angeli 엔조 도리아 감독, 1977, 이탈리아), 내가 본 가장 슬픈 장례식이 있었던 <배리 린든>이 그랬다 (Barry Lyndon 스탠리 큐브릭 감독, 1975, 영국). 크기는 작지만 돌비 스테레오 사운드를 내세우는 극장인, 파리 15구 저 구석에 있는 르 그랑 파부아에서,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고 팀파니가 가슴을 때리는 헨델의 사라반데가 다 끝나고도, 그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파리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되뇌며 마지막 메트로에 올라탔다.
초등학교 때였다. TV 주말영화 시간에 누나와 싸우다 결국 형이 내 편을 들어줘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천사들의 눈동자>. 정확히 기억난다. 어느 시골 마을에 살인자가 숨어든 것을 아이들이 발견한다. 들켰을 때 “제기랄!” (Jesus Christ!) 하고 내뱉은 말을 아이들이 예수님으로 알아들으면서 그의 요구대로 숨겨주지만, 아이들만의 비밀은 점점 퍼지게 되고, 결국 경찰에 끌려가는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오래도록 남는 그런 영화였다. 나도 그 아이들 무리에 끼어 함께 가슴아파했었다. 그리고는 한두해 전쯤인가 채널을 돌리다 어느 흑백영화에 시선이 멈췄는데, 왠지 낯설지가 않은 게 심상치 않아 계속 보다보니 점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제목은 바뀌어 있었지만 분명했다. 신마다 그리고 배우들의 얼굴과 대사 한마디한마디를 확인사살하느라 브라운관이 뚫어져라 집중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지금껏 내 머릿속에 남아 있던 라스트신이 앞서갔다. 가슴을 졸이며 다다른 엔딩은 막상 내가 저장해 두었던 그 각도와 배치가 아니었다. 아이들도 그때만큼 그리 슬퍼하지 않았다. ‘그래, 언젠가는 한번 걸리겠지’ 하고, 한 25년을 기다려온 거나 마찬가지인데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옛사랑은 다시 보는 거 아니라고 누가 말렸다. 그래도 봤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래서 그런 건 다시 안 보기로 했다. <우리들만의 비밀> (Whistle Down the Wind 브라이안 폽스 감독, 1961, 영국).
삼십대 중반에 선 지금, 나를 감동시키고 나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영화를 앞으로도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아니, 결론은 부정적이다. 사실 몇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영화가 달라진 게 뭐 그리 있을까. 나의 심장이 두터워진 게지. 스크린을 바라보는 나의 눈은 여지없이 “그래, 얼마나 했나 한번 보자” 하며 두손을 들어 올려 팔짱을 낀다. 이래도 되는 건가 두려운 마음에 추억을 더듬어보지만, 그 역시 형용사의 강도가, 많이도 약해져 있다.
곧 알모도바르의 새 작품을 볼 수 있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