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표지 사진에 검은 옷과 흰 리본으로 조의를 표하고 싶다구요” 영화사를 통해 표지 촬영 때 미군들에게 죽은 여중생 효순, 미선이에게 조의를 표하고 싶다는 류승범의 의사를 전해 듣고, 아주 잠깐이나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류승범과 공효진 두 배우가 등장한다면 응당 명랑한 에너지가 넘치리라는, 언제부턴가 자연스레 그들에게 기대해온 모습과는 전혀 다른 제안. 공효진도 흔쾌히 동의했다는 류승범의 아이디어에, 몇초간이었지만 올해의 마지막인 송년호 표지로 혹 너무 무겁진 않을까 하는 갈등도 스쳤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그리고 참 건강한 활기를 띤 그들답다는 모종의 반가움과 미더움 역시.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생각했죠.” 형 류승완과 박찬욱, 김지운 감독은 삭발까지 했는데, 배우라 당장 머리를 깎을 순 없지만 뭔가 해야겠다 싶었다는 게 나중에 들은 류승범의 말이다.
공효진이 먼저, 류승범이 조금 늦게 스튜디오에 들어선 겨울날 오후. 분명 눈이 내려 하얗게 얼어붙은 다음날이었는데, 바깥 추위 때문에 싸늘했던 스튜디오의 공기가 점점 훈훈해졌다. 사진 촬영을 하면서도, 인터뷰를 하면서도, 속닥속닥 이야기와 웃음이 끊이지 않는 두 배우 덕분이다. “얘는 내 발 밟고 모른 척하면서 미소를 짓고 있고, 나는 악 하는 표정인 거야. 어때요 이게 진짜 코미디 아냐” 카메라 앞에서 계속 이런저런 자세를 연출하는 류승범에게 장단을 맞추며, 공효진은 연신 웃음을 참느라 고생이다. 쿨한 표정으로 치는 시늉을 해달라는 류승범의 주문에 툭툭 쳐 보이는 공효진, 맞아서 아픈 듯 익살 반 엄살 반의 표정인 류승범. 어느새 <품행제로>의 나영과 중필이 곁에 와 있는 듯하다.
드라마 <화려한 시절>에서 만난 두 사람이 처음 스크린에서 공연한 <품행제로>는 80년대 청춘들의 유쾌한 성장담. 문덕고의 ‘쌈장’인 불량학생 중필과 모범생 민희의 풋사랑을 주축으로, 여고 ‘짱’인 나영과의 삼각관계, 중필의 아성을 위협하는 싸움꾼 상만의 갈등, 10대들의 아기자기한 일상의 에피소드와 80년대 문화의 복고풍 감수성을 포개놓은 영화다. 류승범에게는 “첫 주연작”이기도. 아닌 게 아니라 <품행제로>는 보는 내내 류승범이 아니었다면 어땠을지 상상이 잘 가지 않을 만큼, 류승범의 영화다. 푸른색 ‘추리닝’ 차림에 만사 귀찮은 표정으로 담배를 물고 학교 담을 넘어 등교하는 첫 등장부터, 류승범은 영화의 감성을 몰아가는 막강 엔진이다. 중필은 동급생들보다 한살 많은데다 곧잘 수업을 빼먹고 학생들에게 돈을 뜯는 이른바 문제아. 중필이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아침에 책을 읽고 교양을 처먹어야지 도시락을 까먹어!” 하고 같은 반 동생들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민희와 친한 모범생 영만에게 말을 걸고자 영어책을 뒤적이며 “잉글뤼쉬”라고 발음을 굴릴 때, 류승범의 천연덕스러움은 가히 압권이다. 눈썹을 올리며 인상을 쓰는 표정이나 건들거리는 동작, 평범해 보이면서도 웃음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연기가 보는 이의 시선을 휘어잡는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중필과 한몸이 된 듯한데, 정작 류승범 자신은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고. “처음엔 너무 웃기려는 느낌”이어서 고민했다는 그는, 촬영을 3∼4시간씩 미루고 조근식 감독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근데 감독님의 한마디가 딱 몸에 들어왔다. 중필이는 도심 속의 섬 같은 아이다, 아무도 침범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눈에 띄어서도 안 된다는.” 그래선지 표정 하나하나로 웃기다가도, 상만에게 ‘짱’ 자리를 위협당하자 수군거리는 아이들의 뒤에서 씁쓸해할 때나 악을 쓰며 싸우는 중필이를 보면 어쩐지 짠해진다. 학교의 질서 속에 쉽게 섞여들 수 없는 인물의 거친 성장기에서, “표면적인 코미디말고도 언뜻언뜻 드러나는 쓸쓸함, 외로움을 봐줬으면” 했다는 그의 바람이 담긴 때문일까.
“류승범이 저것밖에 안 되냐고 할지 몰라도 할 수 있는 건 다했다”면서, 그는 “그 시간을 꾸려가는 게 힘들지만, 부딪치고, 싸우고, 설레는” 첫 주연의 기억이 행복했던 눈치다. 후반에 찍은 학교장면 즈음에는 다들 “수위 조절이 안 될 만큼”신이 나 있어서 웃다가 NG를 낼 만큼, 즐긴 흔적도 역력하다.
스크린 체류 시간은 중필보다 짧지만, 오공주파를 이끄는 여고 ‘짱’ 나영 역시 <품행제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 민희에게 심술도 부리지만, 중필을 대신해 야구 배트를 잡고 상만과 대적하러 갈 만큼 깡다구가 센 나영은, <네 멋대로 해라>의 송미래 못지않게 당찬 매력이 넘친다. “여자 짱이란 것도 매력있고, 카리스마도 있고.” 중필의 마음을 “물어보고는 싶지만 확인하지 않으려는, 여린” 이면을 지닌 나영이 되면서, 공효진은 “처음으로 살갑게 인물의 감성을 느꼈다”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사랑받지 못해 속상할지언정 연적에게조차 의리를 지키는 그의 분신들은 사랑스럽도록 씩씩하다. 옆에서 “20대 초반에, 보통은 얼마나 예쁘게 비쳐지는지에 관심이 많게 마련인데, 이런 여배우도 드물다”고 한마디 거드는 류승범의 말이, 분명 그저 여자친구를 위한 공치사는 아니다.
6개월가량 <품행제로>를 촬영하는 동안, 공효진은 정신없이 바빴다. 이미 찍고 있던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와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까지 세 가지 일을 병행해야 했기 때문. 잠도 거의 못 자고 <품행제로>를 찍으러 부산에 내려갔다가, 현장에서 쓰러지는 바람에 류승범이 공효진을 업고 뛰는 소동이 일기도 했다. 그래도 금세 다시 일어나 제 몫을 해내고야 마는 게, 그의 연기에서 드러나는 ‘깡’이 이미지만은 아닌 듯하다. <긴급조치 19호>와 <서프라이즈>, 가장 최근에 개봉한 <철없는…>까지 다작에 겹치기 출연을 피하지 못한 한해였지만, 별탈없이 성실하게 지나왔다. 모델 시절부터 5년지기 친구인 조은지와 연인 사이로 출연한 <철없는…>은 “동성애 연기도,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인생을 바치는 황금숙이란 캐릭터의 애절함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올 한해 공효진의 출연작은 4편. <피도 눈물도 없이> <묻지마 패밀리> <복수는 나의 것>의 소아마비 장애아 연기까지 류승범의 출연작도 4편이다. 편수는 많지만, 너무 가벼워지거나 무거워지는 일없이 거침없는 젊음을 발산하는 두 배우의 전모를 알기엔 턱없이 모자란 시간. 류승완 감독의 <마루치 아라치>에서 양아치가 아니라 형사로 출연할 류승범, 형부와 처제의 사랑을 다룰 드라마 <눈사람>에서 17살부터 25살까지 성장해갈 공효진의 내년이, 또 궁금해진다.
연기 변신
류승범 | “비슷비슷하다는 말도 듣고, 변화에 대한 고민도 하는데, 배우가 변하는 게 아니라 작품이 배우를 변화시키는 것 같다. 그래도 얼마나 다른 작품인가보다는 어떤 작품이냐를 보고 싶고. 하다보면, 나란 배우를 바꿔주는 작품도 만나겠지.”
공효진 | “어느 기사에선가 짝사랑 전문 배우라고 하더라. 아직 내가 다른 느낌이 안 나나보다. 배우로서 겉모습도 캐릭터와 비슷해야 할 텐데, 안 맞는 옷을 입고 싶진 않다. 시간이 지나면 또 변화하겠지”
지나온 1년, 앞으로 1년
류승범 | “너무 쉼없이 지나왔다. 인간 류승범을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다행인 건 작품이 남아 있으니까…. 내년에 <마루치 아라치>를 잘 끝내놓고, 연극을 꼭 해 보고 싶다. 지가 뭔데 스타가 됐다고 연극도 마음대로 하느냔 오해를 사고 싶진 않지만, 관객과 1m 거리도 안 되는 그 무대에 꼭 서보고 싶다.”
공효진 | “정처없이 바쁘게 달려왔다. 뭔가 하고 싶은 마음을 잃을 만큼. 드라마를 또 하는 게 좋을까 고민도 했는데, 나란 배우의 캐릭터도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사람>에서는 철없이 과장된 연기말고도 더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물처럼 흘러가듯 살고 싶다. 돈은 못 벌어도 하고 싶은 일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