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와의 만남은, 여백 속에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것 같은 수묵화를 본 기분을 주었다. 그에게는 양날의 칼처럼, 오랜만의 영화에 대한 큰 애착과 복잡한 세상사에서 한발짝 물러선 듯한 초탈함이 등을 맞대고 있었다. 3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이 그에게 여유와 동시에 더 큰 책임감을 남긴 것일까. 그는 “마치 첫 영화 개봉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2003년 1월24일 개봉하는 <이중간첩>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갔다.
<이중간첩>은 1980년을 배경으로, 남한에 위장귀순한 북한 간첩 ‘림병호’의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다. 실화는 아니고 ‘있었을 법한 이야기’. 림병호는 동베를린의 북 정보국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서베를린으로 위장귀순한 인물로, 남한에서 북한쪽 간첩 역할을 하게 되면서 이중간첩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남과 북 양쪽에서 이용당하며 점점 더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 속에 걸려든다. 림병호를 연기하기 위해, 한석규는 체중도 조금 줄이고 살갗도 태우고 머리도 짧게 자르고, 귀순용사를 만나 이야기도 하고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도열한 인민군 부대 앞줄에 또렷이 드러나는 한석규의 얼굴은, 이미 <이중간첩> 예고편에서 ‘림병호’의 모습을 예고하고 있다. 끝까지 고민거리였던 ‘말투’문제는 공작원 교육 때 남한의 표준어를 배웠다는 설정하에 북한 말투를 쓰지 않는 걸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외적인 것이다. “북한 사람이요 그보다는 그냥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했어요”라는 말에서, 림병호라는 인물에 대한 한석규의 독특한 해석이 짐작된다. “제가 대학교 때 배운 대로 항상 작품의 주제를 정리하는 버릇이 있거든요. <이중간첩>은, ‘남북 분단체제 유지를 위해 희생되는 남북 사람들’이라고 주제를 정리했어요. 거창하고 무겁죠 하지만 어디선가 한번쯤 접했을 이 주제를 구체적인 영상으로 보여주는 게 이 영화의 재미예요. ” 족집게 과외교사처럼, 그는 자신의 출연작을 꼭꼭 집어 또박또박 설명했다.
‘입맛’으로 한 사람의 마음속을 훔쳐볼 수 있을까. 요즘 한석규는 “특별히 맛있는 게 없어졌다”고 한다. “예전에는 새로운 음식이 나오면 그렇게 맛있었는데, 요새는 소박하게 아욱국이나 내 입맛에 맞는 김치, 뭐 그런 게 좋아요. 사는 것도, 일상의 소소한 재미가 제일 재미있는 것 같아요.” 두딸 뒤로 세 번째 아기를 기다리고 있는 한석규는, 이제 다섯살이 되어가는 큰딸이 <쉬리>며 DVD를 보며 아버지가 배우인 걸 아는 듯 보일 때, 아이를 데리고 영화를 보러 다닐 때, 그런 재미가 어떤 것보다 좋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남쪽 바닷가를 휙 둘러보는 가족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고. 그런 그에게, 영화는 일상의 소소한 재미와는 상반되는, 갈수록 더 많은 책임감을 요구하는 막중한 일로 여겨지는 듯했다. <이중간첩>에도 포스터며 후반작업 기간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는 모습. “지명도가 높아질수록 책임져야 하는 부분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이제 8년 정도 되니까 영화의 시스템도 알겠구요. 영화촬영에서 시간의 중요성이니, 제작사나 연출자의 입장이니, 배급의 중요성이니, 하는 것들을요. 그 모든 분들께 좋은 결과를 줄 수 있게 연기자 입장에서 의견을 제시하려고 해요.”
1964년생. 아직 마흔도 안 된 나이지만, 한석규는 1년, 2년이 아니라 ‘후대’까지 내다보고 있다. “웬지 자꾸 무엇인가를 남긴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나중에 한국영화회고전 같은 데서 제 영화가 나오면 후대의 사람들이 볼 거 아니에요. 그런 걸 생각하게 돼요.” 3년의 공백 동안 쑥쑥 후배 배우들이 커나왔지만, 여전히 최고의 가치를 잃지 않고 있는 배우. 그는 그만큼 한국영화계 안에서 자신이 누리고 있고 또 져나가야 할 역할을 잊지 않고 있는 듯 보였다. 끝으로 조금 성급한 것 같지만 다음 작품 계획을 물었다. “다음에는 밝은 이야기에서 밝은 인물을 연기하고 싶어요. <텔미썸딩> <쉬리> 이번 <이중간첩>까지, 제가 하다보니 너무 인생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이야기만 한 것 같거든요”라고 답하는 한석규. ‘부드럽고 따뜻한 남자’ 이미지가 강해서였나,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가 그동안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않은 역들을 해왔음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