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링>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배우 나오미 왓츠
2003-01-08
글 : 김현정 (객원기자)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불안˝

나오미 왓츠는 항상 뒷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십년지기 친구 니콜 키드먼이 남편 톰 크루즈와 함께 레드카펫을 밟을 때마다 그 언저리에 머물렀지만, 아낌없이 쏟아지던 조명이 왓츠에게 떨어진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키드먼 옆에서, 스스로를 못생긴 그림자처럼 느꼈을 왓츠. 그녀는 “나의 첫번째 할리우드 상업영화” <링>에 출연하면서 마침내 키드먼을 자신의 레드카펫에 초대할 수 있었다. 기나긴 무명시절과 유명한 친구라는 이중의 상처 속에서 헤어나온 나오미 왓츠는 “며칠 동안 준비한 연기를 5분안에 마쳐야 하는 오디션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좋다”는 소박한 말로 뒤늦게 찾아온 스타덤을 자축했다.

왓츠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링>에 출연하기 전 십년 넘는 세월을 숱한 오디션으로 흘려보냈다. 핑크 플로이드의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왓츠는 어머니와 오빠와 함께 영국 전역을 떠돌다 호주에 정착하는 긴 여정을 겪으면서 금세 각 지방의 사투리를 익히곤 했다. “아마 그때부터 내 안에 있는 배우의 기질이 드러났을 거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호주로 이민간 뒤 어머니는 내가 칭얼거리는 게 지겨웠는지 마침내 연기수업을 받도록 허락해줬다.” 그렇게 천성처럼 배우를 꿈꿨지만, 절친한 친구 니콜 키드먼과 달리 기회는 유독 그녀만 알아보고 피해가는 것 같았다. “괜찮은 역 하나, 정말 딱 하나만 있으면 그때부턴 일사천리”라고 그녀를 독려했던 키드먼의 우정도 <옥수수밭의 아이들5> 같은 영화 앞에선 할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지친 왓츠가 요가교사로의 전업을 고려하고 있을 때, “괜찮은 역”으로 보인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오디션이 있었다. 시나리오를 읽게 하지도 않고 “얼굴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라는 이유로 발탁된 그녀는, 이제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카밀라와 다이앤이 동거하는 집처럼 허름한 아파트를 부동산에 내놓았다. 더이상 세장짜리 스크립트를 직접 받기 위해 몇 시간씩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 성공이 왓츠를 빛으로만 감싸안은 것은 아니다.

“<링>의 레이첼은 특종을 쫓아다니는 타블로이드 기자다. 경멸할 만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금씩 변해간다.” 죽음의 찌꺼기를 먹고 사는 옐로 저널 기자에서 예고된 죽음에 떠는 희생자로, 아들을 살리려고 분투하는 어머니로 자신 안에 숨은 그림을 끄집어내는 왓츠는, 티없는 요정 같은 베티와 눈가에 푸른 그늘이 서린 낙오자 다이앤을 동시에 연기했던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성공이 단지 괜찮은 얼굴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루아침에 성공한 행운아로 취급받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왓츠는 키드먼과의 간격을 한번에 좁히려는 듯 수많은 영화를 찍고 있다. 연인 히스 레저와 함께한 <켈리 갱>, 영혼의 무게를 뜻하는 제목을 가진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 케이트 허드슨과 글렌 클로즈를 만나게 될 <이혼> 등이 그녀 앞에 줄을 서 있다. “내 친구는 ‘너는 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처럼 12년을 보내고 나면 영화를 거절하기 전에 ‘내가 정말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히스 레저만큼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지금도 왓츠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그 긴장이 왓츠를 살아 있는 배우로 만들 것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