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미연을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나 하자면, 이미연은 기자가 유난히 따르던 친오빠의 넋을 빼놓은 최초의 연예인이자, 연적이었다. <여고괴담> 때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만난 이미연은, 만남이 거듭될수록 호감과 미더움을 도탑게 하는 ‘의외의’ 친화력으로, 기자가 십년 동안 갈고 닦은 전투욕을 서서히 무너뜨렸다. 이미연은 영화계의 현실을 성토하면서도, 매번 힘주어 새로운 다짐을 했고, 자기 말을 반드시 지켰다. “결혼이 죄는 아니”라면서, 진한 사랑얘기를 하고 싶다고 한 뒤에는 멜로영화(<물고기 자리> <인디안 썸머>)를 들고 나타났고, 액션영화를 하고 싶다고 한 다음에는 그런 요소가 있는 영화(<흑수선>)에 합류했다. “배우가 준비하는 쪽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라는 말은, 최면처럼 주문처럼 그의 길을 틔우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 <물고기 자리> 개봉 무렵 만난 이미연에게 기자는 큰 실례를 범했다. 파국으로 치닫는 외사랑을 연기한 탓인지, 사랑은 없다,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는 비관론을 펼치기에, “자꾸 그런 얘기를 하고 다니니까 불화설이 터지는 것 아니냐”고 무심코 한마디를 던졌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과장된 몸짓으로 크게 웃던 이미연이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을 때 두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었다.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한달쯤 뒤에 이혼 발표를 접했다. 정중하게 미안했다고 할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안부를 물을까. 스튜디오 앞에서 마주친 이미연이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통에 암기한 대사를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미연은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는 어정쩡한 인사에, “그러게요. 눈치채셨겠지만, 생각보다 빨리 일이 생겼어요”라고 응수하며, 여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만했다. 5년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각자의 길을 가겠다고 발표한 뒤로, 그러니까 불과 몇달 사이 이미연을 둘러싼 상황이 급변했으니까. 청룡영화제에서 <물고기 자리>로 여우주연상을 받고, 히트 발라드곡을 모아 편집한 앨범 <이미연의 연가>가 밀리언셀러 대열에 오르고, <인디안 썸머>의 예고편이 전파를 타고 화제에 오르면서부터다. 계약 해지와 위약금 운운하던 광고주들은 연장 계약을 청했고, <인디안 썸머>의 촬영이 끝나기도 전에 <흑수선>의 구애를 받았다. KBS의 대하사극 <명성황후>에 명성황후 역으로 캐스팅돼 편당 400만원의 출연료를 받는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이쯤 되자, 이미연에게 ‘서른살 이혼녀’의 딱지를 붙였던 언론은 발빠르게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배우로다시 조명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에선, 그가 이혼을 상품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잔인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왜 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들을 못 할까요? 이혼 덕을 보려는 거면, 결혼은 왜 했겠어요. 공인으로 사는 게 참 힘들어요. 내가 죄지은 것처럼 숨어살기를 바라는 걸까요?”
대중이 이즈음의 자신에게서 새삼 무엇을 발견하고 열광하는 것인지, 이미연은 알지 못한다. 그저 대중은 그때그때 보고 싶은 것을 보는가보다, 짐작할 뿐이다. “대중의 마음을 읽기 싫어요. 그러면 휘둘리게 될 것 같아요. 그러기 싫어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요. 앞으로도 그럴 거구요.”
이미연은 얼마 전 새 매니지먼트사와 계약을 맺는 자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나를 믿고 곁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돈을 많이 벌어주거나, 인기를 유지하겠다고 장담 못한다. 다만 언제 어디서든, 연기 열심히 하고, 곧잘 한다는 칭찬만큼은 듣게 해 주겠다고. 그것은 분명, 이미지 메이킹 잘하고 인기 관리 잘해서 상품가치 높이겠습니다, 맨발 벗고 뛰겠습니다, 선서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수년 전 경험한 길고도 지독한 슬럼프가 그에게 강한 ‘내성’을 심어줬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작가가 쓴 시나리오도 내 인생만큼 드라마틱하지는 않을 거예요.” 이미연은 하이틴 스타로 등극한 뒤 한동안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작품과 만나고 헤어졌지만, 연기에 대한 욕심이 생기고 주관이 생기고 나서는 ‘유부녀’라는 딱지 때문에 변변한 기회조차 만나질 못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그뒤 2년 가까이 작품 섭외가 들어오지 않았다. 결혼 당시 무명이던 남편이 ‘스타’로 부상하는 동안, 자신은 급속도로 잊혀지고 있다는 생각에 울기도 많이 울고, 연기를 포기할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인생에서 연기를 빼면 남는 게 없었다. “남들이 나를 영화배우로 인정하지 않을 때도 나는 영화를 고집했어요. 돌아가는 법을 몰라서요. 오만한 거죠. 그 오만함 때문에 손해도 많이 봤지만, 그래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보충 인터뷰를 위해 옮긴 자리에서 우연히 김보성을 만났다. 이미연과 김보성, 두 사람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데뷔한 이래 꾸준히 알고 지낸 오빠 동생 사이. “혼자 된 동생한테 용돈 좀 달라”고 너스레를 떠는 이미연에게 김보성은 “네가 더 잘 나가지 않냐”고 윽박지르다가, 못 이기는 척 ‘남자답게’ 스윽 계산서를 들고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미연은 아득한 눈길로 추억에 젖었다. “배우가 참 좋은 직업인 것이, 그때의 내가 또렷이 생각나네요. 지방 사인회에 가서 극성팬들한테 머리카락 뜯기던 일이며, ‘장미촌’이라는 카페에서 <행복2>는 안 하겠다고 울던 기억이 나요.” 혼자 생각하고 결정할 수 없었던 답답함, 이용당한다는 피해의식에 시달리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청순가련한 비련의 여주인공 이미연에 대한 기억은 우리에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다고 했다. 누구는 이미연에게 “너무 일찍 파마를 한 것이 실책”이라고 나무랐다지만, 그 자신은 끊임없이 변신하고 발전할 기회를 찾았다. “성공한 이미지를 써먹을 생각들만 하는 게 싫었어요.” 그렇게 만난 드라마 <창 밖엔 태양이 빛났다>에서 가정이 있는 남자를 유혹하고 파멸로 이끄는 악녀를 연기했는데, 처음 시도한 변신에 스스로는 합격점을 매겼지만, 그의 팬들은 뜨악해 했다고 한다. 청순가련한 우리의 아이돌이 팜므파탈이 되다니, 받아들이기 싫었을 수도 있겠다. 그 작품에 출연한 이후로 CF가 모조리 끊겼을 정도. 결혼 직후에 출연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후 2년여의 공백 뒤에 출연한 <넘버.3>에서 이미연은 시인을 꿈꾸는 푼수데기 호스티스로 과감한 변신을 시도했다. 억척스러우면서도 귀여운 ‘미시’의 이미지는 이미연의 두 번째 트레이드 마크로 <주노명 베이커리>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이미연이 명실공히 ‘배우’로 인정받게 된 것은, 다시 멜로드라마로, 처음처럼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돌아온 뒤부터다. <물고기 자리>에서 그는 무료할 만큼 잔잔한 일상 속에서 한 남자를 만나 폭풍 같은 사랑을 느끼지만, 거부당한 뒤에 스스로 삶을 거두는 여인의 종말을 담담하고 비장하게 그려냈다. 그리고 15번째 영화 <인디안 썸머>에서 다시 한번 죽음과 맞닿아 있는 삶, 삶과 맞닿아 있는 죽음 사이에 가로놓인 ‘사랑’을 연기했다. <인디안 썸머>에서 이미연은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다가 자신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박신양)와 ‘늦가을에 찾아온 여름날’(인디언 썸머) 같은 짧고도 찬란한 사랑을 나누는 이신영 역을 맡았다. 이미연은 슬픔을 느낄 기력도 없고 제대로 표현할 수도 없는 캐릭터라는 생각에, 눈물이 흘러내리면 스스로 NG를 내가며, 감정을 꾹꾹 누르고 표현 수위를 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힘들게 찍은 영화라고. “예고편이랑 스틸을 보면, 이때 내가 참 많이 슬펐구나, 하는 게 느껴져요.” 사적인 시련을 상품화했다는 비난을 비롯한 여러 가지 억측들을 잠재우고 싶은 욕망 때문일까. 이미연은 인터뷰 뒤에 예정돼 있는 기술 시사에 가고 싶지 않다고 고백할만큼, 걱정과 긴장에 싸여 있었다.
이미연은 올해로 영화 데뷔 14년째다. 그리고 지금 16번째 영화 <흑수선>을 찍고 있다. 충무로의 여배우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서른살’로 생각하는 데다, 결혼은 곧 은퇴라는 공식을 답습하고 있는 터라, 지금 이미연의 선전은 꽤나 반갑다. 한국에서 여배우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한다는 것이, 반드시 쇄락으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희망’을 우리는 이미연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나이를 먹으면, 연기를 더 잘할 수 있어요. 그게 여배우의 자기 관리 문제만은 아녜요. 배우는 선택하기도 하지만 선택받기도 하는 만큼, 관객의 생각과 영화계 풍토가 뒷받침돼야죠. 앞으로 영화를 몇년 더 할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이 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미연이든 이미숙이든 누구 한 사람에게 총대를 메게 하거나, 표본이 돼라고 강요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연은 이미 그 길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지켜보는 이로선, 함께 나이를 먹는 여배우가 스크린에 있다는 사실이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