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부터 예술영화 작가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빅터 타란스키 감독. 왕년에 오스카 후보 지명을 두 차례나 받은 바 있는 그가 <시몬>의 첫 장면에서 몰두하고 있는 작업은 촬영장에 놓인 사탕 그릇을 헤집어 빨간 캔디를 골라내는 일이다. 신작 <선라이즈 선셋>의 주연 배우 니콜라가 요구한 계약 사항 중 그녀가 싫어하는 체리맛 사탕이 촬영장 안에서 눈에 띄면 안 된다는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타란스키의 비굴한 노력도 보람없이 까탈스런 스타는 트레일러 높이를 트집잡아 출연 의사를 번복하고 스튜디오는 타란스키를 해고한다. <시몬>은 이 대목에서, 그리스 신화를 통틀어 할리우드가 가장 즐겨 찾는 인물 피그말리온을 다시 한번 초빙한다.
피와 살을 가진 살아 있는 배우에 환멸을 느낀 타란스키는 한 편집광적 과학자가 목숨과 맞바꾼 연구를 통해 유증한 소프트웨어 ‘시뮬레이션 원’을 사용해 아름답고 연기 잘하고 무엇보다도 감독에게 순종하는 디지털 여배우 시몬(Simulation One의 준말)을 빚어낸다. 시몬의 등장에 언론은 “제인 폰다의 목소리, 그레이스 켈리의 우아함, 젊은 소피아 로렌의 육체, 오드리 헵번과 천사를 합쳐놓은 얼굴”이라고 열광한다(시몬의 영화를 제작한 회사는 마침 아말감 필름이다). 쟁쟁한 클래식 스타들의 크림만 걷어 조합한 그녀는 완벽하다. 타란스키 감독이 시몬에게 가하는 ‘화룡점정’은 완전무결한 미모에 인간적 틈을 만들기 위해 찍는 애교점이 전부다.
제작자에게 솔깃한 매력적 컨셉과 시놉시스를 갖춘 프로젝트였으리라 짐작되는 <시몬>은 세상의 모든 감독- 특히 남성 감독- 들이 품을 법한 판타지의 절정인 동시에, 모든 배우- 특히 여배우- 에 대한 모독처럼 보인다. 배우란, 그러니까 <시몬>에 따르면 감독이 불행히도 몸이 여러 개가 아니라서 부득이 동원되는 귀찮은 필요악일 뿐이다. 수십억의 사람을 한꺼번에 간단히 능멸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시몬>에는 대중을 향한 불신 또한 희미하게 깔려 있다.
<트루먼 쇼>를 쓰고 <가타카>를 연출한 앤드루 니콜 감독에게 할리우드 풍자코미디 <시몬>은 동일한 테마에 의한 알레그로의 변주곡이기도 하다. 전작에서 ‘조물주 콤플렉스’에 집착해온 니콜 감독은 <시몬>에서도 여전히 수족관을 구경하는 태도로 누군가의 계략에 의해 조작된 세계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들여다본다. 디지털 신호 0과 1의 조합에 불과한 시몬은 두편의 영화로 동시에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고 기립박수를 받는다. 홀로그램 형태로 무대에 선 그녀의 데뷔 콘서트는 위성을 통해 타지마할과 피라미드 벽에 영사된다. 이윽고 시몬과 타란스키의 권력관계가 역전되고 시몬의 실재를 입증하는 데에 전력투구하던 타란스키가 그녀의 부재를 증명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처지로 바뀌면 니콜 감독은 극중 타란스키 감독의 영화 제목 <지푸라기 신>(Straw God)처럼, 무능하기 짝이 없는 ‘신’ 혹은 신을 사칭하는 자를 즐겁게 조소한다.
그러나 풍자극으로서 <시몬>의 평점은 코미디로서 <시몬>이 거둔 절반의 성공에도 미치지 못한다. 할리우드의 어리석은 관행과 스타 숭배는 매우 참신한 조롱의 수사를 요구하는 낡은 풍자의 대상이다. 하지만 앤드루 니콜의 플롯은 모든 기능이 원터치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해결되는 타란스키의 컴퓨터처럼 단순하다. 뉴욕 시절을 그리워하고 인간의 정신을 진실의 빛으로 밝히겠다는 추상적 목표를 외치는 빅터 타란스키 감독이 향수를 느끼는 영화의 시대는 실상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신기루다. <시몬>의 교만한 스타, 부화뇌동하는 스튜디오 간부, 호들갑떠는 타블로이드 잡지 기자의 캐릭터와 그들이 펼치는 사건의 기승전결도 디지털 캐릭터 시몬만큼이나 평면적이며 인공적이다. 줄거리의 흥미로운 전환점을 마련하는 시몬의 반항도 단발에 그칠 뿐 결코 긴장을 고조시킬 만큼 영악하고 치밀하게 발전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좋은 영화는 훌륭한 감독과 순종하는 배우가 아니라 훌륭한 감독과 배우의 밀고당김 사이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앤드루 니콜 감독 자신이 믿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닌 게 아니라 <시몬>은 인간이 아닌 이미지를 조율할 때만 세련된 솜씨를 발휘한다. 앤드루 니콜 감독은 소독약 냄새가 풍기는 결벽증에 가까운 태도로 화면의 구도와 프레임의 인테리어에 공을 들였다. 만약 <시몬>에 효과적인 풍자가 있다면, 타란스키의 영화 속 영화들이 보여주는 장엄한 프로덕션디자인에 잠재된 <트루먼 쇼>와 <가타카>의 자기 패러디일 것이다. 스크린의 가로 세로 비율로 구획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이 찍은 <시몬>은 그런 실질적인 이유에서 본다면 반드시 극장에서 보아야 할 영화이기도 하다. <시몬>은 교훈은 휘발됐지만 근사한 삽화가 들어 있는 어른을 위한 현대의 동화다. <트루먼 쇼>와 <가타카>에서 장벽을 넘고 대기권을 벗어나 끝내 새로운 지평을 보았던 앤드루 니콜이지만 이번만큼은 블루 스크린 앞 푹신한 소파에 파묻혀 ‘컷’을 외치고 말았다.
촬영감독 에드워드 라흐만헤어초크부터 소더버그까지
그가 촬영한 영화 중 <시몬> 단 한편만 보았다고 해도 에드워드 라흐만(55)이 회화적 수련을 거친 카메라맨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미국과 유럽 영화계를 오가며 30년 가까이 꾸준한 활동을 펼쳐온 에드워드 라흐만은, 1950년대 유니버설의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 스타일을 고스란히 부활시킨 토드 헤인즈 감독의 신작 <파 프롬 헤븐>으로 인해 비로소 합당한 주목을 받게 됐다. 때때로 ‘에드 라흐만’으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라흐만의 필모그래피는 할리우드 주류 장르영화부터 유럽 노장의 작품까지 다채롭다.
베르너 헤어초크의 <라 수프리에르>, 수잔 세이들먼의 <마돈나의 수잔을 찾아서>, 빔 벤더스의 <도쿄 가>, 미라 네어의 <미시시피 마살라>, 하니프 쿠레이시의 <런던 킬스 미>, 폴 슈레이더의 <라이트 슬리퍼>가 그의 렌즈를 통해 탄생했고 거칠고 생생한 화면의 질감이 긴박감을 더했던 누아르 <라이미>와 격의없는 카메라워크로 줄리아 로버츠의 발랄한 매력을 재발견하게 만든 <에린 브로코비치>는 소더버그와 라흐만의 합작이다.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라흐만에게 기술상을 안긴 <파 프롬 헤븐>을 작업할 당시 라흐만은 서크 영화의 스틸 사진을 연구하고 필름의 노출 시간을 조절해 보통보다 진한 네거티브로 테크니컬러의 세계를 재현했다. 토드 헤인즈가 그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라흐만은 “토드가 내게 관심을 가진 것은 내가 하나의 스타일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폭넓게 변화할 수 있고 시각적 문법에 대해 열려 있다”라고 말한다.
한편 라흐만은 10대의 성적 일탈을 노골적으로 다뤄 논란을 몰고다니는 래리 클라크 감독과 <켄 파크>를 지난해 공동연출해 활동 영역을 넓혔다. 지난해 10월 비엔나영화제는 특별 프로그램으로 총상영작 11편의 에드 라흐만 회고전을 마련하기도 했다. 에드 라흐만의 최근작은 도중하차한 테리 지고프(<판타스틱 소녀백서>)의 <악한 산타>. 알코올 중독 낙오자가 난쟁이와 함께 백화점을 터는 비주류적 줄거리를 가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제작사 미라맥스는 좀더 주류적인 촬영 스타일을 원했다는 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제작사 미라맥스로부터 “지고프와 예술적 견해차로 고생이 많을 텐데 그만 나와도 된다”는 금시초문의 통보를 받았다는 라흐만은 한 인터뷰에서 “때로는 할리우드가 이른바 인디 영화사들보다 개방적”이라며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