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지금 없는 삶에 얼굴을 숙인다, <노스탤지아>
2003-01-15

특별했던 지난 한해가 저물어갔다. 유월과 십이월에 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광화문에 모여든 촛불의 일렁임에는 잘 알려진 의미에 더해서 말로 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 있었던 것 같다. ‘아름답다’고 보는 일은 너무 자주 나의 단점처럼 생각되지만. 아름다움은 촛불집회에서 얼마만큼의 ‘잉여’였을까. 촛불과 함께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노스탤지아>.

‘미친 남자는 도시 한복판에서 사흘 동안 세상의 구원에 대해 계시적인 설교를 한 뒤 몸에 석유를 붓고 분신자살을 하고, 바로 그 시각에 오래 외로웠던 또 한 남자는 멀리 떨어진 어느 야외 온천장에서 촛불을 켜들고 이편에서 저편 끝까지 걸어갔다.’

그런다고 세상이 구원될까 구원이란 무엇일까 이 영화에선 죄를 씻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한 장면을 글로 재현하기에도 지면은 모자란다.

안드레이 고르차코프는 러시아 지식인, 그가 이탈리아로 온 것은 동향인 파벨 사스노프스키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서였다. 사스노프스키는 19세기의 작곡가로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했는데, 심한 향수병에 시달렸다. 고르차코프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낯섦에 둘러싸인 채 그는 고통받는다.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전원풍경도, 통역사 유제니아의 유혹도 그의 마음을 점령하지 못하고, 실망한 그녀는 그를 떠난다. 고르차코프는 점점 더 추억에 잠겨 러시아의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한다. 다만 도메니코라는, 자신의 가족을 세계의 멸망으로부터 지키겠다며 수년간 감금해서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는 한 인물만이 그의 마음을 끈다. 도메니코가 로마에서 분신하자, 안드레이는 촛불을 들고 물 위를 걸으라는 그의 유언을 따르기로 한다.

‘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어쩌면 놀라운 공감의 형식이다. 고르차코프에게는 작곡가 사스노프스키와 광인 도메니코의 삶에서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내게는 고르차코프에게서와 같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잘 등져지지 않는 80년대의 한국을 떠나 문학공부를 한다며 독일로 건너간 뒤였다. 이 영화와의 만남만이 특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무렵 나는 영세를 받았고, 잦은 비와 밤안개로 기억되는 날들 속 어느 날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문득 거울을 본 듯, 그리고 추상적이지만 투명하고 견고한 어떤 삶의 태도 같은 것을 조명 받은 듯하였다.

결국 영화는 불과 물을 통한 은유적 제의의 순간을 향해 흘러 나아간 셈이지만, 나를 사로잡은 것은 우선은 속죄나 구원보다 ‘외로운, 지리멸렬한, 어둑한, 기억에 사로잡힌, 말없이 바라보는’ 한 남자의 몸짓이었다. 물론 끝내 고르차코프의 ‘지리멸렬’만이 나를 기쁘게 한 것이 아니었다. 나를 위로한 것은 영화의 시선의 방식이었다. 성화처럼 엄숙하게 포착하고 한없이 유연하게 이동하는 시선의 느낌은 희박한 인물들의 외면적 삶과는 아이러니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일치로부터 구원이 떠오른다. 누추하고 갈등에 가득 찬 삶이 어떤 시선에 의해 문득 견고하고 정결한 무릎 꿇음의 자세로 발견된다는 경이로움이 있었다.

노스탤지어란 말에는 그리움과 아울러 시대착오라는 뉘앙스가 있다. 그러나 도미니코나 고르차코프가 드러내는 것은 모든 삶은 ‘다른 삶’과의 관계 속에서 부단히 부정되고 또 확정된다는 것, 즉 삶은 본래적으로 은유적인 구조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도메니코와 고르차코프가 은유를 완성할 때, 바로 그 지점에서 그들의 삶은 끝이 난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것은 한 자루의 촛불이었다.

신비하지 않은가. 그토록 놀라운 완성인 촛불마저 사소한 풍경처럼 꺼지고 다시 켜질 수 있는, 세상이라는 공간의 광막한 넓이는.

조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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