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내 청춘에 부친다, <일 포스티노>
2001-04-25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6년 전 여름이었을 것이다. 종로의 한 예술극장 그 어둠 속에서 “연애시가 내 몸 전체에서 돋아났다”는 그 명민한 시인을 만났다. 파블로 네루다. 칠레 남부 국경지방에서 철도직원의 아들로 태어나서, 19살에 그 유명한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를 출간하고, 24살에 외교관이 되어 세계각지를 떠돌다가 정치의식에 눈뜨게 되고, 40살에 광산노동자의 요청으로 상원의원이 되었으나 우익독재의 집권으로 비밀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수년간 유럽을 유랑, 이후 살바도르 아옌데를 지지했고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제3세계의 희망이었으나, 독재자 피노체트의 등장과 함께 절필과 더불어 사망함.

그리고 또 한 사내 마리오…. 궁벽한 어촌에서 가난하고 어수룩하고 직업도 없고 하릴없이 컴컴한 극장에 끼어 앉아 낄낄대던 청춘, 이 보잘것없는 사내는 이국으로 추방된 시인 네루다를 위해 우편배달부가 되고, 아름다운 여인 베아트리체에게 가슴저리며, 마침내 네루다의 친구가 된다. 그리고 네루다는 자기의 조국으로 돌아간다. “낡은 연애시조차 힘겨워하던” 마리오…. 그는 홀로 남아 영혼을 깨우는 소리를 듣는다. 파도소리, 나뭇가지에 스치는 소리, 아버지의 고달픈 그물소리, 밤하늘의 별이 반짝이는 소리…. 이제 마리오는 시인이다. 그의 시가 영혼과 만나는 순간 그는 이 지상과 이별한다. 그리고 우리는 저 코발트색 짙푸른 지중해 바닷가를 한없이 걷는 네루다와 함께 순백의 그 영혼을 추억한다.

원색의 화면 위로 울리던 루이스 바갈로프의 선율은 나의 호흡을 삼키고, 나는 눈을 감는다. 사랑하는 여인 베아트리체 앞에서 숨막혀하며 내밀던 연서, 시위현장에서 네루다에게 바치고자 낭독하려고 했던 그러나 허공에 뿌려지고만 시…. 뒤늦은 고백이긴 하지만, 그 웅크린 청춘의 마리오는, 가진 것 한푼 없으면서도 철없는 연애시로 청춘을 탕진했던 나의 젊은 날들과 너무 닮았다. 또한 그 젊은 날의 우상은 파블로 네루다이고 채광석이고 김수영이었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 詩가 나를 찾아왔다/ 난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강이었는지/ …/ 뜻하지 않는 타인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고독한 귀로길에서/ 그곳에서 나의 마음이 움직였다.” (네루다,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 중에서)

이 영화를 끝낸 직후 숨진 마시모 트로이시(마리오)를 위해, 영화의 끝에는 위 ‘詩’가 인용되고 있다. 이 영화를 위해 마시모는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런데 정작 나는 이 우편배달부와 위대한 시인의 이야기가 실화인지 픽션인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픽션일 수도 있고,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어렴풋이 첫줄을 썼다/ …/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순수한 지혜/ 그리고 나는 문득 보았다/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네루다, ‘시’ 중에서)

영화 속에 그려진 마리오의 모습이 이 ‘시’에 너무도 선연하다. 그 우정과 영혼의 교류는 허구와 사실 그 이상의 것이리라. 우리는 너무도 파블로 네루다를 사랑하고, “어수룩하고 순수하게 밤하늘과 우주”를 노래한 마리오를 사랑하므로… 어쩌면 <일 포스티노>는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의 변주 그 자체이고, 한편의 통렬한 연애시이기도 하다. 그 한편의 통렬한 연애시를 나는 얼마나 열망했던가! 그 연애시는 단순한 사랑이 아닌 그 무엇, 영혼의 울림,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마침내 도달한 한편의 절망의 노래라는 것을 나는 알기나 한 것일까?

속절없이 청춘은 흘러가고, 많은 것은 또 잊혀지고, 그러나 사랑의 기억과 우정의 끈들은 내곁에 머물러 있다. 지금 나는 드라마를 ‘업’으로 하고 있다. 그동안 나는 “쉽게, 빠르게”의 세계에 익숙하게 적응하고, 첨단과 과잉의 욕망에도 적당히 타협하며, 사소한 것들에만 옹졸하게 흥분하는 미덕을 익히고 말았다. 그리고 불현듯 “그게 겨울이었는지 강이었는지/ …/ 나의 마음이 움직이는/ 어디서 왔을지도 모를” 그 무엇을 대면하기도 한다. 그것은 내 생활의 편린이기도 하고, 한 자락 새로 잇는 사랑과 우정이기도 하고, 내가 몸담고 있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마리오가 건져올리던 그 영혼의 소리를, 시인에게 부치지 못한 녹음테이프편지를, 그 소박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조금만이라도 내가 느낄 수 있다면… 그리하여 내가 만든 드라마를 당신에게 전할 수 있다면, 이 또한 나의 부질없음일까? 내 청춘의 지인들에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조그마한 편지를 부치고 싶다. <일 포스티노> 마리오에게도.

글: 정성효 |KBS드라마국 PD·<꼭지>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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