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세상을 할퀸 시간, 그녀를 비껴가다, <이중간첩>의 고소영
2003-01-22
글 : 문석
사진 : 이혜정

고소영을 표현하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말들이 필요하다. ‘똑 부러진, 당당한, 도도한, 자신있는, 거침없는, 영리한’ 등등. 대신 ‘갇힌, 매여 있는, 순종적인, 다소곳한, 어두운, 무거운’ 같은 표현은 그녀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때때로 ‘되바라진, 건방진, 성마른, 이기적인’ 등의 비난기 짙은 표현을 뒤집어쓰기도 했지만, 이처럼 뚜렷한 성격은 고소영을 90년대 초반 이후 ‘신세대’의 또렷한 표상으로 자리잡게 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녀의 열성팬 중 여성의 비중이 훨씬 높은 것도 이런 이미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팬들에게 고소영은 단지 스타가 아니라, 스스로가 소망하는 모습을 대리 체험케 해주는 일종의 역할모델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이중간첩>의 윤수미 역은 그닥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윤수미는 북으로 넘어간 아버지의 생존을 위해 남한에서 숨죽이며 활동하는 고정간첩. 위장귀순한 이중간첩 림병호(한석규)를 돕다가 동정과 연민을 느끼게 되고, 남과 북 양쪽에서 쫓기며 비극적인 사랑을 나누게 된다. 역사의 굴레에 ‘갇힌’, 가족사에 ‘매여 있는’, 북의 지령에 ‘순종적인’, 그래서 ‘어둡고 무거운’ 캐릭터인 셈이다. “좀 다른 영화를 해보고 싶었어요. 강하고 인상적인.” <이중간첩>이 명백히 ‘남성영화’이다보니 자신의 역할에 한계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처음으로 경험하는 큰 규모의 영화인데다 ‘영화가 잘돼야 배우도 잘된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출연하기로 결정했다는 것. 연기에 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한 <연풍연가>를 시작으로, <하루>와 <이중간첩>으로 인연의 끈을 이어나가고 있는 쿠앤필름 구본한 대표에 대한 믿음도 한몫했다.

<하루>를 끝낸 뒤 시간을 두고 어렵사리 결정한 작품이니만큼 의욕이 넘쳐났지만, 조건은 만만치 않았다. 가장 큰 장애는 추위였다. 해외 로케이션 등을 고려하다보니 스케줄이 꼬여 한여름에 스튜디오에서 겨울장면을 찍은 데 이어, 11월부터 야외에서 여름장면을 촬영해야 했다. “겨울철 밖에서 반팔 입어보셨어요” 게다가 입김이 나오지 않도록 얼음물을 마셨고, 나뭇가지에 고드름이 맺히는 것을 바라보며 비까지 맞았다. 이쯤 되니 뚱뚱해 보일지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옷 안에 붙인 ‘핫팩’도 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정신이 없어 대사를 하다가 잊어버리기도 했다”니 보통 고생이 아니었나 보다. 림병호와 펼치는 멜로 아닌 멜로 연기도 쉽지 않았다. 무겁기 짝이 없는 남북문제가 얽혀 있어 멜로라는 요소가 들어갈 여지가 그리 넓지 않은데다, 수미와 병호가 만나는 상황 자체가 긴박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주입받은 대로 자기 감정을 배제하며 살아야 했던 수미가 사랑하게 되는데, 리얼리티를 살리려면 사랑을 그저 숙명으로 무뚝뚝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그 흔한 키스신도 없어요.”

그래도 현장에 대해 좋은 기억이 남아 있는 데는 한석규를 비롯한 스탭들의 도움이 컸다. 영화에선 처음이지만 커피 CF를 통해 함께 연기한 적이 있는 한석규는 말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역시 생각대로” 고소영을 배려해줬다. 그는 자신의 촬영분량이 없어도 촬영장에 케이크를 사들고 오기도 했고, 프라하에서 로케이션 도중 생일을 맞았을 때는 남모르게 마리오네트 인형과 오페라 <카르멘> 티켓을 전해주기도 했다. “내가 무용할 때부터 비제의 <카르멘>을 좋아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또 우락부락한 외모와 달리 너무 조용하게 말을 하곤 해 ‘슈렉’이란 별명이 붙은 김현정 감독의 꼼꼼한 배려나 <하루> 때부터 함께 작업해 “진지한 연기를 하려면 쿡, 하고 웃음이 날 정도”로 친해진 스탭들이 없었다면 고소영은 기분좋게 촬영을 마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스크린을 통해 2년 만에 모습을 보이다보니 기대도 많고 걱정도 많지만, 작업에 관한 한 대체로 만족한다는 표정이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수미가 지고지순한 성격이란 거겠죠.” 여성 캐릭터에 대한 그녀다운 불만은 <이중간첩>에 한정되는 게 아니다. “한국영화에선 여성 캐릭터가 너무 한정적이에요. 슬프고 비극적이고 큰소리 내면 안 되고, 하는 식으로 보수적인 것 같아요.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봐도 멜로영화가 대부분이에요. 개인적으로는 스릴러를 좋아하는데, 어쨌건 강한 캐릭터를 해보고 싶어요. 예를 들어 다중인격자라든가, 이런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그렇다고 아직 다음 작품을 결정한 것은 아니다. 마음에 쏙 드는 시나리오만 있다면 “내일이라도” 출연할 수 있지만 성급한 판단을 하기는 싫다는 얘기다. “CF에서 돈 벌면서 왜 영화엔 안 나오냐는 비난은 억울해요. 제가 좀 다혈질이다보니 어릴 땐 마음에 맞지 않는 작품을 하면 짜증을 내곤 했어요. 그러지 않기 위해 신중하려 하고 욕심을 덜 내려고 해요. 결국 어설프게 선택을 하다보면 관객에게 실망밖에 더 드리겠어요”

이제 고소영의 나이도 서른 하고도 둘. 연기 경력도 11년차니, 스스로의 말마따나 “중견 연기자”의 문지방을 넘고 있는 셈.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외모에서 서른두해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스스로 ‘스타일리스트’가 돼 연출했다는 검은색 짧은 원피스와 롱부츠 차림의 그녀는 세월의 신이 ‘비호’해주는 듯 여전히 도도하고 싱싱한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그녀의 ‘영원한 젊음’에 관한 일화 하나.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촬영된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생활고에 찌든 초라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고소영은 김현정 감독의 지시대로 촬영 전날 밤 라면을 먹었고, 머리도 일부러 동여맨 채 잤다. 다음날 아침, “와, 저렇게 바뀌었어”식의 ‘센세이션’을 기대하며 촬영장에 나타난 고소영은 감독과 스탭들로부터 예상 밖의 반응을 들었다. “뭐야 똑같잖아.”

그렇다고 시간의 흐름이 그녀를 완전히 비껴간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동안엔 나이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어요. 근데 올해 들어 나 서른두살이다, 이런 생각이 들데요. 아…. 그렇다고 20대 초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스물일곱, 여덟이 딱 좋은 것 같은데, 노력하면 모습에서 보이는 것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이제부터 고소영을 표현하기 위해 ‘원숙함’과 ‘진중함’이란 단어를 추가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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