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로즈버드`에 대해 묻지 말아주오, <시민케인>
2003-01-22

국도극장이었는지 대한극장이었는지 하여튼 처음으로 일류극장에서 가서 봄. 당시 고등학생이던 사촌형들이 중학생 관람가라며 초등학생이던 나를 빡빡 깎여서 데리고 감. 겨우 표를 샀음. 애국가가 나오자 자리에서 모두 일어났음. 애국가가 끝나자 자리에 모두 앉음. 대한뉴스 시작됨. 영화 시작됨. 성룡 땜에 거의 정신나감. 갑자기 내 뒷자리 아저씨가 나 땜에 안 보인다고 짜증내며 모자를 벗어달라고 함. 나는 빡빡이가 창피해서 엄마가 털실로 짜준 방울모자를 쓰고 있었음. 벗기 싫은 모자를 억지로 벗었는데 주위가 온통 웃음바다가 됨. 뒷자리 아저씨는 영화는 안 보고 내 하얀 빡빡머리를 만지작대면서 낄낄댔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성룡의 동작 하나하나에 취해 깔깔댐. 다음날 반아이들 모아놓고 온갖 포즈로 신나게 <취권> 흉내내며 자랑함. 아이들 침흘리며 나의 이야기에 압도당함.

중학교 때 - <로미오와 줄리엣>

지금은 없어진 광화문 국제극장에서 봤음. 단체미팅에서 만난 여자애들과 같이 갔음. 여자애들은 지들끼리 뭉쳐서 앞서가며 깔깔댔고, 남자애들은 한참 뒤처져서 지들끼리 쑥덕대며 걸어갔음. 영화는 참 낯설고 졸렸음. 로미오로 나온 남자가 기생오라비 같다고 생각함. 여자애들은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았음. 집에 돌아와서 ‘교양’에 대해 깊이 생각함. 브룩 실즈, 피비 케이츠 좋아하는 것보다 올리비아 핫세 좋다고 하는 것이 있어 보인다는 것을 깨달음. 덕분에 <로미오와 줄리엣> 볼 때 옆에 앉았던 여자애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사귐. 덕분에 유치환의 <행복>이나 윤동주의 <별 헤는 밤> 같은 시를 낯간지러운 꽃편지지에 적어보기도 함. 이때부터 이중인격이 형성됨. 그리고 연애가 한 인간에게 참 많은 공부를 시킨다는 것도 이때 어렴풋이 알게 됨.

재수할 때 - <영웅본색> 1편부터 십몇편까지

노량진 재수학원 지하 음악다방에서 다 보았음.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구했는지 빔 프로젝터에 제법 큰 화면으로 보여줬음. 전부 삐짜 테이프였음. 주윤발 나오는 거는 다 <영웅본색>이었음. 나중에 알고 보니 1, 2편만 진짜고 나머지는 다른 제목이 다 있었음. 강호정, 타이거 맨, 감옥풍운 같은…. 그중 <영웅본색> 7편에 왕조현이 나왔음. 그때 내가 딱 침 발라놨는데 나중에 <천녀유혼>으로 완전히 떴음. 그리고 그 영화는 나중에 우연찮게 극장에서 다시 보게 됐는데 그때 진짜 제목이 <의개운천>(에스케이프 걸)이라는 걸 알았음. 어쨌든 내가 여자 보는 눈은 있다고 믿게 됨.

대학교 때 - <시민케인>

수업시간에 시도 때도 없이 보았음. 영화가 보는 게 아니라 공부하는 거라는 걸 이 영화 땜에 알았음. 거의 모든 수업시간에 언급이 되며 거의 모든 영화책에 등장하고 시험 때마다 한두 문제씩은 꼭 나옴. 가히 당시 한국영화 교육계의 얼굴마담이었다고 할 수 있음. 그러나 불행히도 아직까지 한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음. 시험 때마다 에로영화 보듯이 중요한 장면 서치해서 보았음. 아직까지도 행여 누가 ‘로즈버드’의 의미나 이 장면의 미장센 어쩌고 하면 경기를 일으킴.

영화아카데미 다닐 때 - 오즈와 브레송의 내가 본 모든 영화들

고다르는 머리에 쥐가 내렸고 타르코프스키와 베리만은 졸렸는데 오즈와 브레송에게 완전히 필이 꽂힘. 이후부터 소설가인 마루야마 겐지와 더불어 이 세명을 평생스승으로 삼아야겠다, 고 하다가 오버하는 것 같아서 관뒀음.

연출부 때 - <거짓말>

한 100번 넘게 보았음. 나중엔 연출부들끼리 대사 따라하기 하며 놀았음. 장선우 감독님 연출부에다가 만 19세 이상 전 국민의 바람이었던 벗는 현장 구경한다는 절호의 찬스에 덥석 물었다가 마음고생 했음. 감독님의 까다로움과 애매모호함과 죽 끓듯 하는 변덕에, 하루종일 여관방에 쭈그리고 앉아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촬영현장의 긴장감에, 하루에도 몇번씩 울음을 터뜨리던 배우에 대한 안쓰러움에, 밤마다 연출부들끼리 술 마시며 감독님 뒷다마 까다보니 영화가 끝나버렸음. 그래도 나중에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는 거저 먹었다는 생각이 듬.

지금 - <품행제로>

개봉날 메가박스에서 마음 졸이며 사람들 몰래 계단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그 밖에 곳곳의 극장에서 친구들이랑 또는 혼자서 몰래 여러 번 봤음. 어서어서 200만명 넘고 300만명 넘어서 보너스 두둑이 받고 몇년 동안 놀고먹었으면 좋겠음. 근데 꼴을 보아하니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음. 그래서 요즘 섹스코미디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음.

조근식/ 영화감독·<품행제로>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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