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TV시리즈가 한창 위세를 떨치던 80년대 중반쯤, <오토맨>(Automan)이라는 시리즈가 있었다. 미국에서조차 13개의 에피소드만 만들어지고 사라졌으니, 우리나라에서도 약 3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만 방영되었을 것이다. 이 시리즈가 기억이 안 난다면, 작은 커서가 날아다니면서 오토맨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만들어주는 장면이나 90도 각도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오토카를 TV에서 본 적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래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이 글과 함께 실린 <오토맨>의 사진을 한번 보시길. 아마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 세대들 중에는 무릎을 탁 치면서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오토맨>의 내용은 경찰서의 전산부서에서 일하는 주인공 월터가 컴퓨터를 이용해 범죄를 소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오토맨이라는 시뮬레이션 인간을 만들어, 그와 함께 범죄자들을 퇴치한다는 것이다. 막 AppleII를 통해 개인용 컴퓨터가 주목을 끌기 시작하던 1983년이라는 시점을 생각하면, <오토맨>의 이런 설정은 정말 황당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커서가 살아 있는 것처럼 날아다니다가 오토맨이나 오토카를 만들어내는 장면들은, 한창 컴퓨터의 세계로 빠져들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한동안 친구들과 만나면 <오토맨>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할 정도. 그렇다고 당시에 그런 시뮬레이션 인간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컴퓨터가 언젠가는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당시 내 믿음을 강화시켜준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뒤로 20여년이 흐르는 동안, 컴퓨터는 그야말로 ‘일’을 냈다. 시뮬레이션까지는 아니지만, 골룸이나 요다 같은 가상의 배우가 정말 흔하디 흔한 일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20년이 지난 뒤에 어떤 세상이 올 것인가는,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이번에 개봉된 영화 <시몬>은 그런 빠른 변화의 과정에서, 앞으로 우리가 혹 겪게 될지도 모르는 시뮬레이션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화제가 된 작품이다. 주목할 것은 영화도 영화지만, <시몬>이 인터넷을 통해 아주 독특한 홍보방식을 선보였다는 사실이다. 그 이름하여 ‘시몬의 정체성 만들기’. 그 내용은 시몬을 실제 배우라고 설정하고 영화 속에서 그려진 이야기들이 현실에서 일어난 것처럼 인터넷에 다양한 홈페이지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런 홈페이지들의 중심에는 여배우 시몬의 공식 홈페이지 ‘리얼 시몬’이 있다. 진짜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홈페이지와 아주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언뜻 보면 구분이 어려운 것이 특징. 시몬의 어릴 적 흑백사진이 올라와 있음은 물론, 그녀가 표지를 장식한 잡지들도 잘 정리되어 있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치열교정기를 끼고 있는 고교 때 사진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영화 속 주인공 시몬과 시몬을 연기한 배우 레이첼 로버츠의 존재가 섞이면서 혼란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정도는 과거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그다지 새롭다는 느낌을 주긴 힘든 것이 사실.
‘리얼 시몬’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시몬이 출연한 세 편의 영화 <Sunrise Sunset> <Eternity Forever> <I Am Pig>의 홈페이지로 연결시켜주는 링크를 제공한다. 각각 별도의 URL을 가진 세 영화의 공식 홈페이지 또한 언뜻 보기에 여타 할리우드영화의 홈페이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특징. 너무 튀어서 어색하기보다는, 오히려 평범하고 사실적으로 보이려는 홍보담당자의 컨셉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상의 홈페이지라는 한계상 첫 페이지 이외에는 별달리 볼 만한 페이지가 마련되어 있지 않는 것이 조금 아쉽다. 그런 아쉬움은 이 세편의 영화 홈페이지와 함께 <시몬>의 공식 홈페이지를 링크시켜놓고는, ‘시몬이 자기 자신으로 출연한 영화’라고 써놓은 유머로 충분히 해소되긴 하지만 말이다.
이 정도까지 네티즌들을 헷갈리게 만들었으면 1년 전만 해도 충분히 주목받을 만했지만, 지금은 그 충격의 강도가 낮은 것이 사실. 그런 상황을 파악했는지 <시몬>의 홍보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영화 속에서 알 파치노가 연기한 감독 빅터 타란스키의 공식 홈페이지와 그의 아내(캐서린 키너)가 운영하는 제작사 아말가메이티드의 홈페이지까지 만들어놓는 치밀함을 선보였다. 그 두 홈페이지 중에서 압권은 빅터 타란스키를 체코계 이민자로 설정하고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대부>(God Father)를 연상시키는 가상의 영화 <Straw God>이라는 10부작 영화를 찍었으며,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는 소개 내용이다. 진지해 보이는 디자인의 홈페이지이지만, 그 내용은 유머로 가득 차 있는 것.
여하튼 이렇게 진짜 홍보페이지는 물론 다양한 가상 홈페이지들을 선보인 전략은, 영화 <시몬>의 특성과 잘 맞아떨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록 그 홈페이지들 방문자가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완결성 있는 가상 홈페이지들간의 연결구조 자체가 알면서도 기꺼이 속아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시몬> 공식 홈페이지 : www.s1m0ne.com
가상의 배우 시몬의 공식 홈페이지 <리얼 시몬> : www.realsimone.com
가상의 감독 빅터 카란스키의 공식 홈페이지 : www.viktortaransk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