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의 공백 끝에 묵직한 영화 <이중간첩>을 들고 한석규가 돌아왔다. 그가 없는 시기, 많은 배우들이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며 자리를 잡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한석규라는 배우가 수많은 영화에서 빚어낸 색깔을 그리워하고, 그만큼 궁금해했다. 남과 북의 권력에 버림받는 운명의 림병호의 건조한 듯 슬픈 얼굴은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만일 배우의 스타일을 배우의 이름을 잊게 만드는 사람과, 배우의 개인적 체취가 드러나는 사람으로 가른다면 한석규는 후자에 속할 것이다. 단점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 배우가 자신의 ‘아우라’를 갖고 있다는 건 분명 축복이다. 그가 정했다는 고즈넉한 삼청동 길 작은 카페에서 지난 21일 만났다.
오랜시간 간직했던 주제, 이중간첩
“이인모씨의 책을 몇해전 읽었어요. 전 서울, 강북토박이이고 가족 중 북에 연고가 있는 사람도 전혀 없어 그런 문제는 고민해본 적도 없었어요. 근데 그 책을 읽고 이런 숨겨진 이야기가 있구나, 충격같은 걸 받았어요. 옳건 그르건 한 신념을 갖고 평생을 사는 인물이 있는 근현대사를 다루는 영화가 꼭 나왔으면 했어요. 남북문제를 다룬다면 그렇게 우리 내부에 접근하는 이야기, 남북 분단체제에 희생된 사람의 이야기였음 좋겠다 생각할 때 <이중간첩>의 시나리오가 들어왔죠.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한 5~10년 전만 해도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쉬리>의 시점이 약간 미래고, <공동경비구역 JSA>가 현재였다면 <이중간첩>은 우리의 청소년기쯤을 되짚으며 우리의 장년·노년은 어찌해야 할까 생각하게 하는 영화죠.
림병호요, 위장귀순자라 행동으로 나타낼 수도 없고 사건을 만들 수도 없는 인물이라 힘들었어요. 드라이하게, 감춰지게 연기하자 했죠. 내적갈등을 관객이 부담없이 공감하도록요. 윤수미와의 멜로적 관계도 건조한 감정선으로 가려 했어요. 결국 숨겨진 분노나 미세한 흔들림인데, 적절한 선을 찾기가 힘들었어요. 림병호의 삶 만큼이나 힘들었다고 할까요. 개인에 초점이 가 있고, 그 인물의 내적인 긴장감에 승부하는 영화에요. 아마 흥행코드를 의식했다면 멜로나 액션이나 과장된 캐릭터 등 더 쉬운 길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유머가 없다는 아쉬움, 주변인물들이 좀 더 뚜렷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죠. 하지만 나중에 몇년이 흘러도, 아니 통일된 이후에 만일 이 작품이 회고전 같은 데서 상영되다면 2003년에 저런 영화가 있었구나 싶지 않을까요.”
안 하는 것이 하는 것보다 어렵다, 3년의 세월
“3년이란 숫자에 큰 의미를 두고 싶진 않아요. 그동안 영화 많이 봤어요. 제가 4형제중 막내고 아내는 6남매중 막내라 저희 애들 둘 말고도 조카가 많거든요. 평일에 시간나는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까, 아이들이랑 많이 다녔어요. 최근에 <품행제로>를 봤는데 중학생인 조카들이 너무 재미있어 하더라고요. 아, 이렇게 새로운 관객이 탄생하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요. 관객변화요 사실 두렵기보다 궁금해요. <이중간첩>만 해도 ‘진지함이 재미’인 영화인데 새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영화 카피 중에 ‘마침내 그가 돌아왔다’고 써있는데 ‘돌아와봤자 별볼일 없더라’ 혼자 농담하며 피식 웃었어요.
연기자로서의 욕심, 물론 있죠. 하나는 다양한, 완성도 높은 장르영화를 하고 싶다는 거고 또 하나는 관객의 연령층을 좀 높이는데 보탬이 되고 싶다는 거에요. 말하고 나니 거창하네요. 다양한 장르영화를 하고 싶다는 건 아마 제 연기에서 제가 많이 보인다는 말 때문이기도 할 거에요. 저는 새 인물에 동화되기 보다 인물을 제쪽으로 끌어들이는 스타일이거든요. 어떻게 해도 한석규라는 이미지는 아마 제가 죽을 때까지 가겠지만요. 한국영화 감독님들도 조금 더 장르에 대한 욕심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요.
요즘 남자배우들 많아졌죠. 정말 좋은 일이에요. 연기자모임이 있어 가끔 후배들 생각을 하게 되요. 제가 보기엔 12년을 주기로 배우들의 큰 무대가 바뀌는 것 같아요. 지금 30살을 전후한 연기자들이 주역세대가 될 텐데 그들이 더많은 영화관(觀)을, 뚜렷한 색깔을 가지길 바래요.”
그는 “너무 어두운 역을 오래해서 다음작은 꼭 밝은 역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고 한석규와 조폭코미디 같은 짝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고 했더니, 그는 빌리 와일더의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이야기를 꺼냈다. “현실에 바탕을 두며 또다른 여운을 줄 수 있는 영화요, 최근엔 <반칙왕> 근사했어요. 그런 코미디물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유난히 친구와 가족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어머니와 종암동 근처 극장을 들락거리던 어린 시절이 자신의 연기에 큰 힘이 된다는 말도 했다. <혹성탈출> <별들의 고향>을 보고 돌아와 혼자 떠들고 공상하며 스토리 만들던 얘기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들과 조카들에게도 그런 정서적인 경험을 나눠주고 싶어했다. 아, 다시 ‘부드러운 남자’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