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SF로 본 <시몬>,코미디로 본 <시몬>
2003-01-27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사이버 프랑켄슈타인,할리우드를 조롱하다

로버트 앤슨 하인라인의 유쾌한 SF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The Moon Is a Harsh Mistress>은 달세계 독립운동을 벌이는 일단의 혁명가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혁명의 실질적인 수뇌는 마이크라는 슈퍼 컴퓨터인데, 자신의 존재를 비밀에 부치기 위해 애덤 셀렌(Adam Selene)이라는 가공의 선동가를 창조해낸다. 문제는 혁명이 무르익자, 애덤 셀렌이 더이상 숨어서 글만 발표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 인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이크의 해결책은 애덤 셀렌이 등장하는 비디오 화면을 조작하는 것이다.

이 계획을 듣자, 이 소설의 화자이자 동료 혁명가인 마누엘은 질겁하며 외친다. “넌 목소리는 아주 잘하고 있어. 몇천 가지 결정을 1초 동안에 할 수 있는 정도니까. 하지만 비디오는 사정이 달라. 그걸 하려면 매초에 몇천만번이나 결정을 내려야 해. 마이크, 넌 너무 빨라서 나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야. 하지만 비디오 화면을 내보낼 정도로 빠르지는 못해.”

하지만 마이크는 해낸다. 마누엘은 마이크의 스크린 위에 뿌연 구름 같은 것이 떠오르더니 그게 점점 사람의 얼굴로 굳어지는 것을 지켜보다 입이 딱 벌어지고 만다. 하인라인은 지금 컴퓨터그래픽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를 예언한 1966년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은 1966년 작품이고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달세계 혁명은 21세기 후반에 일어난다. 당시에 활동했던 많은 SF작가들처럼 하인라인도 심각한 계산 착오를 일으켰다. 그는 우주선과 같은 거대한 기계들의 발전을 과대평가했지만 인터넷이나 디지털 혁명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초는 어떤가 우린 마이크와 같은 생각하는 컴퓨터도 없고 달식민지도 개척하지 못했지만, 디지털 세계에서는 하인라인이 상상도 못했던 온갖 것들이 튀어나오고 있다. 하인라인은 컴퓨터그래픽에 대해 대충 짐작하기는 했지만 그 가능성과 영향력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달식민지가 세워지려면 앞으로도 반 세기 이상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사실적인 컴퓨터그래픽 인간은 그보다 훨씬 일찍 나올 것이다.

영화판에서 디지털 배우는 더이상 SF의 영역이 아니다. <타이타닉> 이후 수많은 디지털 스턴트 더블들이 할리우드에서 활약하고 있다. <쥬라기 공원> 이후 할리우드 SF영화를 점령하고 있는 디지털 괴물들도 디지털 배우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배우들만 등장한 <파이널 환타지>의 영화 버전이 제작될 때, 많은 배우들은 정말 긴장했었다. 다행히도 영화의 결과가 기대보다 못한 편이어서 지금은 다들 조금씩 안심하고 있는 중이지만 말이다.

<파이널 환타지>가 제작될 무렵, <시몬>의 감독이자 각본가인 앤드루 니콜은 정말로 디지털 배우 주인공 시몬 역으로 디지털 배우를 쓸 생각까지 했다. 사실 진짜로 배우 조합 사람들의 신경을 긁은 영화는 기본적으로 애니메이션영화였던 <파이널 환타지>가 아니라 일반 극영화인 <시몬>이었다.

결국 니콜은 그 계획을 포기했지만 후유증은 심각했다. 나는 아직도 <시몬>이 흥행 실패를 한 이유 중 하나가 할리우드 사람들의 신경을 잔뜩 긁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실수는 영화의 소재인 디지털 배우라는 컨셉을 영화가 채 시작하기도 전에 SF의 영역에서 끌어내려 실제 세계인 할리우드에 던졌다는 데 있었다. 현실을 앞서고 능가해야 할 장르영화의 소재가 영화 개봉 이전에 벌써 일상적인 개념이 되어버렸으니, 결코 만만한 장애가 아니었던 셈이다.

코미디 <시몬>, SF <시몬>

<시몬>은 SF이고 코미디다. 이 둘이 모순되는 건 아니지만, 영화에서는 이 두 장르가 각각 자신만의 주제를 따로 배정받고 있다. 코미디로서 <시몬>은 할리우드에 대한 풍자극이다. 영화는 먼저 값어치에 비해 쓸데없이 비싸게 구는 스타들을 조롱한다. 이 영화에서 대표적인 타깃이 되는 인물은 위노나 라이더가 성깔있게 연기한 니콜라 앤더스다. 대우에 불만을 품은 니콜라 앤더스가 영화를 관두고 뛰쳐나가자 주인공인 영화감독 빅터 타란스키는 디지털 배우인 시몬을 니콜라 대신 등장시키는데, 시몬은 돈 한푼 안 받고 어떤 특별 대우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니콜라보다 더 나은 일을 해낸다. 여기까지는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를 책임지는 위치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스타들의 변덕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신나는 복수극이 된다.

영화는 타란스키로 대표되는 영화감독들을 놀려대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재미있게도 타란스키는 시몬이 탄생한 뒤 ‘스타들에 의해 놀아나는 감독’ 역할에 더 충실하게 된다. 타란스키는 시몬을 완벽하게 통제 가능한 스타로 만들었지만, 시몬의 명성이 그의 명성을 넘어서게 되자, 그는 문자 그대로 시몬에게 종속되게 된다. 한마디로 함정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다른 함정에 빠져버린 셈이다.

시몬이 스타로 떠오르면, 영화의 타깃은 할리우드가 생산해내는 번지르르한 허상들을 게걸스럽게 삼켜대고 재생산해내는 매스컴과 대중으로 옮겨지게 된다. 시몬이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 소동에서 아무런 핸디캡도 되지 않는다. 어차피 이들이 만들고 소비하는 것도 약간의 상상력을 처바른 이미지와 사운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흥미로운 주제들이다. 유감스럽게도 앤드루 니콜은 그렇게까지 좋은 코미디 작가가 아니어서, 이런 주제들을 살리기 위해 그가 동원한 농담들은 그렇게까지 효율적이지는 못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내가 계속 키들거리며 웃었다는 것도 대단한 증거가 못 된다. 내가 이런 가짜들의 이야기를 특별히 편애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특별히 나쁠 건 없지만 비교적 만만한 코미디는 <시몬>을 실제 이상으로 단순한 영화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이것은 은근히 <시몬>의 줄거리와 비슷할 수준으로 아이로니컬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편리한 도구로 사용된 코미디가 너무 단순하고 쉽게 쓰여진 나머지, 그 단순한 코미디가 영화 전체를 대변하게 된 것이다.

슬슬 여기서 <시몬>의 SF적인 면을 끄집어낼 때가 됐다. 자, 그럼 <시몬>은 어떤 종류의 SF인가 절대로 하드SF나 사이버펑크는 아니다. 둘 다 치밀한 과학기술지식 묘사가 필수적인 소장르인데, <시몬>이라는 영화는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다. 하긴 앤드루 니콜의 다른 SF 각본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는 기본 아이디어만 취하면 설정이 아무리 비현실적이어도 대충 무시한다. 덕택에 유전자 검색을 수초 안에 해낼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신분증의 사진 대조도 하지 않는 보안체계나, 특별히 재미있을 것 같지도 않은 텔레비전 쇼를 위해 달에서도 보일 만한 거대한 세트를 짓는 방송사 같은 것들이 그의 각본에는 당연하게 등장한다. <시몬>도 예외는 아니다. 과연 시몬이 컴맹 중년 감독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해낼 만한 계획일까

환상의 힘, 무엇이 나쁜가?

만약 이야기가 이 정도의 비현실성에서 안주한다면, 우린 영화가 진짜로 하려는 이야기가 구체적인 미래에 대한 경고보다 더 추상적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가타카>와 <트루먼 쇼>에서 니콜의 주제는 조작된 환경 속에서도 조용히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인간의 존엄성이었다. <시몬>도 그런가

답변하기 전에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살펴보자. 지금까지 니콜이 쓴 세편의 SF들은 모두 사기와 기만에 대한 것이었다. <가타카>에서 주인공은 출세를 위해 시스템을 속인다. <트루먼 쇼>에서는 오락을 위해 전세계 시청자들과 방송사가 주인공을 속인다. <시몬>에서는 할리우드에서 살아남으려는 영화감독이 전세계를 속인다.

세편의 영화에서 사기는 모두 다른 의미를 가진다. <가타카>에서 사기는 주인공이 생존을 위해 사용하는 무기이다. <트루먼 쇼>에서는 대중이 주인공을 박해하는 도구이다. <시몬>에서는 앞의 두 영화들과는 달리 이 영화에는 더이상 사기 행위를 통제하는 쪽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기 행위로 창조된 환상은 그 자체의 힘을 갖고 속이는 쪽과 속는 쪽 모두를 휘둘러댄다.

이 점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시몬>이 다루는 환상은 더이상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라는 인간적 가치를 부여받지 않는다. <시몬>에서 시몬은 거대한 자연의 힘처럼 그냥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시몬의 가치가 아니라 시몬의 영향력이다.

코미디 <시몬>에서 시몬은 기본적으로 껍질만 있는 공허한 존재이다. 하지만 SF <시몬>에서 시몬은 그 자체로 생명력이 있는 괴물이다. 시몬을 살아 있는 괴물로 만들기 위해 인공지능을 달아줄 필요도 없다. 시몬을 움직이는 생명력은 타란스키와 매스컴이 알아서 보급해준다. 그들의 사랑, 욕구, 갈망은 약간의 상상력, 예술적 터치와 결합해 시몬이라는 인격체를 만들어낸다.

타란스키는 SF의 가장 오래된 주인공 중 한명과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 그는 할리우드의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다(심지어 세례명도 같다). 그의 여정도 유명한 선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괴물을 창조하고 그 괴물을 통제하려 시도하다가 결국 괴물을 죽이려고 시도하고 그러다가 결국 괴물의 힘에 넘어가버린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SF <시몬>이 시몬을 그렇게까지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타란스키를 일련의 난처한 시련 속에 던져넣는 코미디 <시몬>과는 달리 SF <시몬>은 그에게 분명한 해결책을 마련해준다. 타란스키는 시몬과 싸워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 해결책은 시몬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것이다. 때려부수기엔 환상의 힘이 너무 강하다.

그리고 그건 그렇게까지 나쁜 일이 아니다. 과연 가짜가 그렇게까지 거부해야 할 존재인가 어차피 할리우드가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상품은 이미지와 사운드로 구성된 환상이며 픽션이다. 그 상품들을 이미지와 사운드로만 구성된 환상의 존재가 개입해서 만든다고 해서 우리가 공포에 질려야 할 이유가 있을까 결과물은 진짜 사람들이 만든 것과 전혀 다를 게 없는데 말이다. 우리가 진짜로 신경 써야 할 건 그 출신 성분이 아니라 결과물의 아름다움과 예술적 완성도가 아닐까

우리가 그 가짜들을 어떻게 생각하건 실제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이다.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에서 애덤 셀렌은 결국 달세계를 지구로부터 해방시킨다. 나중에 어떤 역사학자가 애덤 셀렌이 가공의 존재라는 것을 밝혔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달세계의 독립에 끼친 업적이 갑자기 사라지는가

앤드루 니콜이 정말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계속 사기꾼들을 주인공들로 내세운 영화 각본을 써왔던 이 뉴질랜드 남자가, 가짜와 허상의 힘에 대해 심사숙고하다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주 이치에 안 맞지는 않다. 만약 그가 잘하지 못하는 코미디를 거두고 좀더 정공법을 택했다면 이 주제는 좀더 잘 먹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디지털 배우에 놀아나는 할리우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코미디 이외의 장르를 택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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