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 사각거리는 연필소리, 책을 함께 나누어보기 위해 ‘ㄱ’자로 어깨를 맞댄 위치, 닫힌 문, 좁은 방, 책상 아래 움찔 부딪히는 서로의 발가락. 그럴 때쯤 긴장을 깨는 엄마의 간식. ‘국·영·수 20점 향상’을 위해 마련된 이 사각의 작은 책상은 의외로 근사한 로맨스의 현장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 친구보다 먼, 선생님보다는 가까운, 기껏해야 3, 4살 차이나는 대학생 오빠, 누나와 과외를 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묘한 긴장의 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 두 사람. 이들의 사정은 좀 다르다. 비록 스승과 제자라는 운명으로 만났지만 같은 나이인데다가 도저히 로맨스가 형성될 여지가 없는 성격들이다. 학생은 선생에 대한 환상은커녕 처음부터 반말에 “촌스러운 게 복길이 같다”는 둥의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고, 선생은 ‘sometimes’를 ‘소메티메스’로 읽을 만큼 입만 열면 무식이 줄줄 흐르는 이 학생이 예쁠 리 없다. 하여 이들이 마주앉은 책상은 ‘사랑이 꽃피는 나무’가 아니라 피튀기는 전장에 가깝다.
“담배는 이따 피우지 ” “ 지금 열받으니까 피우는 건데, 이따 피우라면 이따가 열받으란 얘기냐 ” “…수업하기가 힘들잖아.” “아 그럼 열받게 생기질 말든가∼.” 말끝마다 토달고 비꼬고, 만날 때마다 개와 고양이처럼 티격태격거리는 이들. 하지만 100점 만점에 평균 8점을 못 넘기는 지훈이 다시 자신을 미국으로 보내려는 아버지의 ‘유배선언’에 욱해 “50점을 넘기겠다”고 큰소리를 치면서부터 두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공조체제에 들어간다.
그렇게 영화는 서로에게 가시 돋힌 말을 퍼붓던 남녀의 등을 돌려 마주앉게 하고 차마 발견하지 못한 서로의 장점에 눈뜨게 하며 결국엔 사랑의 감정으로 빠트려버린다. 전형적인 스크루볼코미디의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안전한 방향을 택한 이 영화에 의외의 반전이나 ‘짠’하는 결말은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대신 그 당연한 결말에 이르는 과정, 즉 무겁지도 경박하지도 않은 귀여운 캐릭터들과 이들이 주고받는 대사와 시추에이션을 즐길 필요가 있다. 실제 영문과 98학번인 최수완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2000년 6월부터 나우누리 유머게시판에 연재한 <스와니-동갑내기 과외하기>를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800X600의 모니터에서 맞춰진 짧고 경쾌한 인터넷 세대의 호흡법을 그대로 따른다.
특히 우울한 청춘의 초상이거나(<바이 준>), 이름처름 ‘하늘하늘’한 소녀상(<동감>)을 보여주었던 김하늘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다. 늘 꺼벙하고 실수투성이인데다가, 머리보다는 몸을 쓰고, 때론 능청스럽게 교태의 미소를 보내는 김하늘의 연기는 여전히 몇몇 감정처리에는 미숙한 순간도 있지만 극중 수완처럼 그 미숙함마저 매력으로 다가온다.
원작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바로 지훈의 캐릭터이다. 그저 염색머리에 멋부리는 것 좋아하는 날라리 고등학생 정도로 그쳤던 지훈은 영화 속에서 그보다는 입체적인 인물로 둔갑했다. 조기 유학에 실패한 상황이나 가정사에 대한 구차한 설명이 따라붙는 것은 아니지만 싸움을 걸어온 학교 깡패에게 “니가 여기 짱이라며 그럼 니가 계속해라. 난 관심없다”며 무표정하게 돌아서는 지훈의 얼굴 위로는 어떤 것도 성취하고 싶어하지 않는 의지박약과 무료함으로 가득 찬 요즘 어떤 십대들의 얼굴이 슬쩍 겹쳐진다. 또한 등록금 때문에 원치 않는 과외를 계속 해야 하는 수완에게도 과거의 ‘또순이’나 ‘캔디’ 같은 모습을 발견하긴 어렵다. 경제적인 우열로 보이지 않은 신경전을 벌이는 부모세대들과 달리 이들은 “돈 받고 하는 과외선생 주제에…” 나 “돈 때문에 참는다”는 말을 대놓고 내뱉기는 해도 가난한 통닭집 딸과 부잣집 도련님 같은 경제적 신분 차이쯤은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엽기적인 그녀>를 떠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통신소설’이라는 출생부터 시작해, ‘막가파’식의 완벽한 구어체의 거침없는 대사, 젊고 귀여운 남녀 주인공, 그리고 통닭튀기는 집게를 딸에게 사정없이 날리는 수완의 엄마와 앞서간 ‘조선의 주먹들’에게 기도를 드리고 밥을 먹는 아버지 등 엽기적인 가족 구성원까지. 잘생긴 외모와 재력으로 안하무인에 윽박지르기 좋아하는 지훈과 그에 비해 수동적인 수완은 <엽기적인 그녀>의 견우와 ‘엽기녀’의 성역할을 치환시킨, 즉 여자 입장에서 쓰여진 ‘엽기적인 그놈’쯤이랄까. 하지만 초반의 엽기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파로 마무리지었던 <엽기적인 그녀>의 결말에 비하면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그것은 배우를 위한, 캐릭터에 의한 영화라는 한 가지 목적을 망각하지 않고 끝까지 쿨하게 나아간다.
하여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반 수석하는 반장이 아니라 노력 끝에 애초에 세워놓은 예상 점수를 10점쯤 넘겼으며 그래서 다음 시험결과가 기대되는 짝꿍을 보는듯 귀엽고 대견한 영화다.
김경형 감독 인터뷰 "신파와 감성은 빼고, 쿨하게"
경희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해서 KBS 조연출로 일했던 김경형 감독은 신촌 소극장에서 <오 ! 꿈의 나라>를 본 순간을 “영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영화를 하고 싶다는 흥분상태로 바뀌는 계기”였다고 말한다. 이후 방송사에 사표를 던지고 단편영화 <푸른옷>을 찍었고 충무로 연출부를 거쳐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의 조감독으로 일했다.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그의 늦은 데뷔작이다.
원작에서 어떤 부분을 따왔고 어떤 부분을 제거했나.
원작을 봤을 때 재미는 있었는데 영화가 될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저 요리되기 전 갓 잡아올린 생선 같은 느낌이었다. 일단 인터넷이라는 특성상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고 호흡이 짧은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결국 전반적인 극의 구성이나 주변 인물들은 새로 만들어내야 했다. 김하늘과 권상우의 과외수업 상황은 원작에서 온 게 많고 배경설정, 특히 여주인공의 경우는 새로 쓴 부분이 많았다.
코미디의 수위 조절이 쉽지 않았겠다.
기준은 드라마로 세웠다. 진행 과정들이 앞뒤가 맞아간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웃기든 어떤 공간에 있든 억지스럽지 않게 다가올 거라고 믿었다. 또한 배우들에게 누누이 이 영화의 외피는 코미디다, 그러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이유 같은 것들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곤 했다. 모든 상황에서 왜 이래야 하는지는 분석적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더라도 지훈 역시 기본적인 페이소스가 있을 텐데 조금이라도 그런 점을 의식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힘을 가지니 코미디의 수위는 일부러 조절할 필요없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던 것 같다. 또한 초기에 각색을 했던 박연선 작가가 쓴 짧은 호흡의 대사들이 좋은 게 많았고. 김하늘은 애드리브가 거의 없었는데 권상우는 후반부로 갈수록 자연스러운 애드리브가 늘었다. 그중 재미있는 것은 많이 채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