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키스하고 싶어 연기 시작했죠,<컨텐더>의 조앤 앨런
2003-01-29
글 : 최수임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 <컨텐더>에서 온통 검은 양복들 천지인 ‘정계’ 남자들 가운데 금세 눈에 띄는 조앤 앨런은, 그런 말을 들을 만큼 얼음조각처럼 매끄러우면서도 차가운 외모를 지녔다. 조앤 앨런의 이 ‘너무 단단한’, 그래서 깨질 것 같은 외모는 <컨텐더>의 주인공인 여성 최초 부통령후보 레이니 핸슨의 미래에 대한 일종의 암시다. 주지사의 딸에 화목한 가정의 안주인인 다복한 상원의원 레이니 핸슨. 그녀는 탄탄대로를 밟아 부통령후보에까지 오르지만 학창 시절 벌였던 섹스파티의 사진이 언론에 뿌려지면서 모든 것이 무너져내릴 위기에 처한다.

레이니 핸슨은 역할모델이 없는 특이한 캐릭터였지만, 조앤 앨런은 이를 아주 전형적인 느낌을 담아 표현해냈다. 그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면, 레이니 핸슨이라는 인물이 평론가 출신의 감독 로드 루리가 오직 그녀만을 위해 만들어낸 인물이었기 때문일 거다. <플레전트 빌>에서 어머니 역을 연기했던 조앤 앨런을 보고, 로드 루리는 <컨텐더> 시나리오를 썼다. 평론가의 데뷔작에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유독 탐을 냈다. 그러나 다들 “조앤 앨런은 말구요…”라는 단서를 붙였다. “미셸 파이퍼나 줄리아 로버츠, 데미 무어가 했으면 좋겠는데요.” “아니요, 됐습니다.” 앨런을 캐스팅한 건 루리 감독의 고집이었다.

조앤 앨런은 로셸이라는 일리노이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마을의 고등학교에서 극단을 만들어 연기를 시작했다. 학창 시절의 앨런은 매우 소심한 편이었다. 연극을 시작한 이유도 “남자친구가 생겼으면 해서”였다고. “연극을 하면 그 속에서나마 남자아이와 키스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했죠. 근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자꾸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역들만 했어요.” (웃음) 학창 시절 단 3번의 데이트를 했지만 그때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몸무게가 확 줄곤 했다는 앨런은 내성적인 ‘굿 걸’이었다. ‘학창 시절의 섹스파티’는 먼 얘기였을 것. 그럼에도 앨런은 “핸슨과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라고 말한다. 정치적 기질 아니다. 닉슨 대통령의 부인을 연기했던 <닉슨>에 이어 <컨텐더>까지 정치적 캐릭터를 맡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앨런은 “나한텐 정말이지 정치적인 감각이 없다”라고 고백한다. 정답은 ‘개인주의’다. “저는 굉장히 개인적인 사람입니다”라고 앨런은 말한다. 배우 피터 프리드먼과 결혼해 딸을 하나 두고 있는 앨런은, 할리우드보다는 뉴욕을 편해 하고 걸어서 딸아이를 학교에 바래다주기를 즐기는, 소박한 47살의 생활인이다. “공과 사는 완전히 분리돼야 한다”며 스캔들 공작에 맞서는 레이니 핸슨에게 앨런이 공감을 느낀 건 그 대목이었을 것이다.

브로드웨이 연극 <번 디스>(1989)로 연극계의 오스카라 할 만한 토니상을 받은 바 있는 조앤 앨런은, 그러나 영화로는 아직 오스카 트로피를 쥐어보지 못했다. <닉슨>과 <플레전트 빌>로 각각 오스카 최우수 여우조연상 후보에, 그리고 <컨텐더>로 최우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상을 타지는 못했다. 하지만 앨런은 “노미네이트된 것만으로도 좋다”며 반색을 한다. 닉슨 대통령의 냉정한 부인 팻 닉슨(<닉슨>), 살해당하는 아일랜드 저널리스트 베로니카(<하늘이 무너질 때>), 그리고 스캔들에 맞서 스스로를 내세우는 여성 부통령후보 레이니 핸슨(<컨텐더>)까지. 1985년 <약속장소>라는 영화로 스크린 데뷔를 한 뒤 앨런은 단단하고 강인한 품성을 강조한 역할들을 많이 해왔다. 비록 스튜디오들이 줄을 서는 ‘미셸 파이퍼나 줄리아 로버츠, 데미 무어’ 같은 빅스타도, 오스카 여배우도 아직 못 되었지만, 브로드웨이 출신의 ‘연기파’ 배우 앨런은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오히려 스타시스템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배우 한명이 2천만달러를 받는 건 문제가 있어요. 뭐 그만큼의 역할을 하겠지만, 연기자들 중에는 중산층 이하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제 언니 한명은 조감독이고 다른 한명은 ‘서브웨이’ 샌드위치 가게를 하고 오빠는 빌딩의 관리인이에요. 누군가 저한테 개런티를 많이 받고 있냐고 물어보면, 전 말할 거예요. ‘네! 저한텐 충분해요’라고요.”

화려한 레드카펫 위의 드레스보다는 여자아이의 엄마로서의 일상을 통해 자신의 삶이 견고하다고 느낀다는 조앤 앨런. 11살짜리 소녀의 성장드라마인 캠벨 스콧 감독의 <오프 더 맵>과 어느 남녀의 긴 사랑 이야기를 돌아보는 닉 카사베츠의 새 영화 <노트북>이 앨런의 다음 개봉작으로, 두 작품에서 앨런은 모두 주인공 여자아이의 어머니 역을 맡아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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