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동갑 아님,동감임,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김하늘, 권상우
2003-01-29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비오는 오후, 밀리는 차도를 뚫고 과천에서 공덕동까지 달려온 <동갑내기 과외하기> 커플이 꽃다발을 손에 들었다. 촬영 틈틈이 인터뷰를 진행해야 하는데, 나란히 앉은 김하늘과 권상우는 서로를 놀리고 칭찬하느라 좀처럼 질문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오빠라고 부르고 싶은데 도저히 못 부르겠어요. 보세요, 얼마나 어리게 생겼는지. (웃음) 몇년 동안 연기했지만 권상우씨처럼 마음 터놓고 지낸 파트너는 처음인 것 같아요.” 김하늘이 ‘촌닭’ 과외선생 수완 티를 벗고 수다를 떨자 권상우가 주도권을 낚아챈다. “하늘씨는 잠이 정말 많아요. 너무 많이 자서 힘이 빠질 정도라니까요. 마지막 액션장면 찍을 때도 하늘씨 고생 많이 했지. 밴 안에 틀어박혀서 김밥 먹고 잠자면서 기다리느라고.” (웃음)

김하늘과 권상우가 서로를 딱 찍었다는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82년생 동갑내기들의 치열한 전투와 풋풋한 연애를 담은 영화다.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과외를 시작한 수완은 2년 꿇은 고등학생 지훈 때문에 사는 낙을 잃어버린다. 영어교재를 달라면 <플레이보이>를 내밀고, 한번 입은 옷을 다시 입고 가면 “과외 유니폼이냐”라고 빈정거리는 지훈. 수완은 주변이 산만한 지훈 때문에 패싸움에까지 휘말리게 되지만, 마침내 지훈이 가출함으로써 해방의 순간을 맞게 되자 자꾸만 그가 생각난다. 김하늘과 권상우는 모두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래서 김하늘은 두근거리지만, 그래서 권상우는 마음을 비웠다. 개봉을 기다리는 마음도 반대고, 하루에 필요한 수면 시간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두 사람. 그래도 실제 동갑내기보다 더 동갑처럼 보이는 두살 차이 김하늘과 권상우는 습기 때문에 활짝 피어난 꽃잎처럼 카메라 앞에서 환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미끈한 욕심쟁이,권상우

머리가 백지장처럼 깨끗한 스물한살 고등학생 김지훈. “연로한 나이에 고등학생이면서 부끄러운 줄을” 전혀 모르는 지훈처럼, 권상우는 뒤늦게 연기를 시작해 스물여덟 나이에도 교복을 입고 연기하는 자신이 굉장히 당당하기만 하다. 수능시험 끝나던 날 필름 끊기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싶어서 난생처음 술을 마시고선 영화배우가 되겠다며 큰소리쳤다고, 하지만 같이 술마신 친구만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고, 배우가 된 이유를 설명하는 권상우는 농담할 줄은 알되 돌아갈 줄은 모른다. “이번에도 액션, 많이 하죠. 제가 보여줄 게 그거밖에 없거든요.” 농담 속에 섞인 솔직한 태도. 같이 사진을 찍던 김하늘이 옷갈아 입는 틈을 타서 의자에 앉더니 다시 한번 비슷한 말을 던진다. “제가 초등학교 땐 싸움도 잘하고, 운동은 워낙 잘하고. (웃음) 그래서 액션은 정말 열심히 했어요. 잘할 것 같아서.” <일단 뛰어>와 <동갑내기 과외하기>가 일제히 ‘기생 오라비’라고 지목하는 미끌미끌한 외모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저, 예전엔 발음이 좀…”이라는 소심한 질문도 “발음이 안 되긴 하죠. 근데 영화에 정확한 액션만 하고 정확한 발음만 하는 정확한 배우들만 나오면 재미없잖아요. 저 같은 캐릭터도 있어야 정감이 가지”라며 냉큼 받아안았다.

영어를 말할 줄은 알지만 읽을 줄은 모르는 조기 유학생 김지훈. “시험 보는 영어는 다르잖아”라며 실전과 이론은 별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지훈처럼, 권상우는 연기를 배우기도 전에 <화산고>로 웬만해선 경험하기 힘든 와이어 액션까지 할 줄 알게 됐다. 그렇다고 자신이 연기를 안다는 자만은 삼간다. “영화는 시간이 많아서 좋아요. 항상 시나리오를 머리에 담고 다니다보면 단점을 보충할 수 있거든요.”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단점은 “이병헌이나 장동건 같은 배우들도 처음엔 지금보다 연기가 못했다”는 말로 미루어보건대, 연기가 부족하다는 점인듯. 그러나 그가 선망하는 배우들 이야기를 듣다보면 “욕심이 너무 많다”는 말이 흔한 관용어구만은 아닌 것 같다. 정우성은 보기만 해도 멋있어서, 송강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포인트를 알아서, 설경구는 무슨 연기든 잘해서 닮고 싶다는 권상우. 아직은 화실에 틀어박혀 소년기를 보냈던 청년답지 않게 탄탄한 근육만 자랑이지만, 시나리오가 밝혀주지 않는 지훈의 과거를 꼼꼼하게 분석하면서 “싸움도 잘하고 돈도 많은데 공부까지 잘하면 어떻겠어요. 알고 보면 외로운 놈”이라고 열심히 공부도 한다.

권상우는 인터뷰 시작 즈음에 “이젠 교복은 안 입으려고요”라고 말했다. 스물다섯 넘으면서 어려 보이는 외모가 뿌듯해졌지만, <친구>처럼 서른 훌쩍 넘어 교복을 입으라고 할 때까진 다신 입고 싶지 않다. 겸손했던 권상우, 인터뷰 끝날 무렵 교복을 입지 않으려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들려주면서 “잘하는 거, 자신있는 게 많아서 깜짝 놀랄 만한 캐릭터로 변신”하겠다며 조금 튀는 멘트를 날렸다. 그게 뭘까, 궁금하지만 당분간은 드라마 <태양 속으로>의 해군 대위 강석민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을 듯. 그러나 서른을 바라보는 권상우의 시간은 짧지 않다. 그를 보면, 나이는 몸으로 먹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먹는다는, 진부한 설교가 명쾌한 진리로 다가온다.

청순가련 벗고 몸빼 입기,김하늘

검은색 더플코트를 입고 머플러로 얼굴을 꽁꽁 싸맨 김하늘의 첫인상은 ‘추워 보인다’였다. 싸늘한 스튜디오 공기가 미안하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지만, 눈만 깜박깜박, 냉기에 얼어버린 것 같은 입술은 선뜻 열릴 줄 몰랐다. 캄캄한 방에서 혼자 울면서도 의붓동생에게 애틋한 마음 한 자락도 비추지 않던 <피아노>의 김하늘, 첫사랑의 슬픈 결말을 받아들이려 애쓰던 <동감>의 김하늘이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처럼. 그런데 의상이 사람을 바꾸는 걸까. 프릴 달린 파란 니트 밑에 얇은 블라우스를 입고 나온 김하늘은 전혀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재잘재잘 말문을 트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작은 그녀는 찜질방을 좋아하고, 알아보는 눈만 없으면 사우나를 더 좋아하고, 청순하게 다듬어진 모습으로만 스크린에 머물러야 했던 스트레스를 확 풀어줘서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연기할 필요가 없었어요. 현장에 도착해서 재미있게 지내다가 그대로 촬영 들어가면 됐으니까.” <바이 준>으로 데뷔한 98년부터 청춘의 그늘만을 품어온 김하늘은 이제야 젊음의 또 다른 표정을 찾은 듯 보였다.

김하늘 자신조차 청순가련에 젖어 있었던 몇년 전이라면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늘씨, 몸뻬 입을 수 있겠어요”라는 김경형 감독의 말을 듣고 “네, 저 몸뻬 입고 싶어요” 하면서도 속으로는 겁부터 더럭 났으니까. 그런 김하늘이 “마음껏 망가지는” 재미를 알게 된 건 드라마 <로망스> 덕분이었다. 데뷔 초에는 “TV는 안 할 거예요”라고 당돌하게 말하기도 했지만, 바쁜 일정에 쫓기면서 혼자 모든 걸 해결하고 배워야 했던 TV드라마 촬영은 신비한 은막의 소녀를 서툴고 허점 많은 신인배우로 돌려세웠다. “처음엔 후회도 많이 했어요. 영화는 연기가 모자라도 덮어주는 부분이 많은데, TV는 제가 봐도 너무 아찔하게 못하는 거예요. <로망스> 찍으면서도 처음엔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게 아닌가, 자주 움츠러들었어요. 그런데 스탭들이 잘한다고 박수 쳐주고, 시청자들도 그런 장면을 좋아하니까 자신이 생기더라고요. <동갑내기 과외하기>도 스탭들이 좋아하면 망설이지 않고 그냥 했어요.”

김하늘은 이제 스물여섯, <닥터 K>를 찍을 무렵 스스로 “스산하고 고독하다”고 표현했던,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수없는 감정을 던지던 이미지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촌닭 소리를 들으면서도 막무가내로 문제학생을 책상 앞에 끌어다 앉히는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귀여운 수완에 머물 수만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꿈꾸는 배우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메릴 스트립. “펑펑 울었어요. 메릴 스트립이 비맞고 서 있는 연인을 보면서 자동차 손잡이를 움켜쥐는 장면이 있거든요. 내려야 할까, 망설이는데, 어쩌면 감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이젠 배우의 손이 말하는 이야기도 들을 줄 아는 김하늘은 산악영화 <빙우>에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랑과 받지 못한 사랑 사이에 선 한 여자로 출연한다. 자신을 둘러싼 이미지를 한발한발 침착하게 벗어나온 김하늘. 그녀는 밧줄 한 가닥에 의지해 산을 마주하고선, 또 어떤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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