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3일 오후 5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주변은 저녁 어스름의 잿빛 구름에 덮인 채, 환하게 불 밝힌 꽃 농장의 온실 불빛들만 반짝거린다. 우리식 대로라면 공항 출구부터 영화제 깃발로 뒤덮여 있고, 당연히 이름이 적힌 피켓이라도 들고 누군가 기다릴 줄 알았는데…. 공항에는 영화제를 알리는 흔한 포스터 한장 붙어 있지 않았다. 물어물어 픽업 서비스 창구에 가서야 여행안내 책자 사이로 영화제 홍보엽서가 조금 놓여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개막 이틀째라 영화제 사무국과 게스트 라운지 등은 한가로운 편이었다. ID카드를 받아들고 호텔에 짐을 풀고 나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시차 때문에 새벽에 눈을 떠보니 눈은 어느새 비로 바뀌어 있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공식일정을 확인하려고 일찍 영화제 사무국으로 향하던 중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9시가 다 되어서도 어둑어둑한 하늘에서는 계속 비가 내리는데, 아직 문도 열지 않은 창구 앞에서 티켓을 예매하려는 사람들이 건물 밖까지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꾸물거리던 날씨는 낮이 되자 언제 그랬냐 싶게 갰지만, 티켓 예매소 앞의 분주함은 하루종일 계속 됐다. 거기다 국내영화제에선 하루 4회 이상 상영하는 경우가 드문데, 여기선 종일 6편까지 볼 수 있게 상영시간표를 짠 것도 신기했다. 아침 9시부터 밤 10시 넘어서까지 상영과 관람이 이어지는데, 이른 오전이나 늦은 밤에도 극장은 영화를 보러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형스타나 유명감독이 방문하지도 않고, 대규모 이벤트나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상영장 주변 외에 로테르담 도시 전체는 조용한 편이었지만, 이 영화제에 온 사람들은 열심히 영화를 보고 얘기를 나누면서 정말 실속있게 영화제를 즐기고 있었다
“영화 속 한국 직장문화가 신기해요”영화제 공식 데일리 뉴스지와의 첫 인터뷰. 꼼꼼히 수업 듣는 학생처럼 박찬옥 감독의 답변을 열심히 받아적던 여기자는, <질투는 나의 힘>의 영문제목()에서 코미디영화가 연상된다고 한다. 다음날 이어진 네덜란드 문화예술 TV와의 인터뷰. ENG 카메라 인터뷰라 배경이 괜찮은 곳을 고르느라 영화제 본부 건물을 여기저기 헤매고 나서야 간신히 시작됐는데…. 정작 그 옆에서 음식과 식기 나르는 일을 하는 바람에 사운드는 엉망이었다. 걱정스런 눈빛을 보냈으나 사운드 담당자는 나중에 더빙이나 자막을 입힐 것이니 상관없다는 태도다. TV기자는 영화에서 묘사된 한국 내의 직장문화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일이 끝나고 그렇게 자주 직장사람들끼리 어울려 술을 마시는지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 한윤식처럼 부하 직원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 일이 빈번한지 등등….
드디어 첫 일반 관객 시사. 약 500여석의 객석이 대부분 채워진 것을 바라보며, 영화제 집행위원장인 사이먼 필드의 소개로 감독과 함께 무대인사를 했다. 상영을 한 곳은 7개관이 밀집된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우리 영화가 상영된 곳은 중간 크기의 상영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스크린 규모가 엄청나게 컸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영사기 마스킹을 허술하게 해서인지, 우리나라에선 아직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필름 풀 사이즈 크기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상영 도중 자리를뜬 건 정확히 38명이었다. 영화 중반 이후부턴 한명도 없었는데, 500석 규모 극장에서 이 정도면 실적이 좋은 걸까?기술적인 아쉬움, 한국적 정서와의 교감 등에서 불안감이 있었지만 대체로 관객은 영화를 무리없이 이해하는 편이었다. 특히 문성근, 배종옥 등 배우들의 연기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좀더 적극적인 관객 질문과 의견들은, 토니 레인즈가 진행한 두 번째 상영부터였다. 두 남자주인공, 이원상과 한윤식의 호모섹슈얼리티 분위기에 대한 내용, 박성연, 안혜옥 두 여성 캐릭터에 대한 여성 감독으로서 페미니스트적인 시각여부에 대한 질문 등, 국내 시사 때와 비슷한 내용들이었다.
특히 홍상수 감독에 대한 유럽 관객의 넓은 인지도 때문인지, 진행하는 토니 레인즈부터 일반 관객에 이르기까지 홍 감독의 조감독 출신으로서 작품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와 연출 스타일을 비교하는 질문이 많았다. 하긴 영화제 공식 책자에 소개된 박찬옥 감독의 약력에서도 홍상수 감독의 조감독 경험 사실을 공들여 밝히고 있는 걸 보면, 자신들의 영화제에서 발굴한 작가(홍상수 감독은 1997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작품상인 타이거상을 수상했다)에 대한 긴밀한 애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느껴졌다.
송종국 선수, 로테르담에 떴다!
12개 부문에 걸쳐 700여편이 넘는 장·단편 영화들이 상영되는 터라 관심갈 만한 영화를 골라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우리 영화와 함께 경쟁부문인 타이거상에 오른 작품들이었는데, 시상식이 있기 전 감독이 기억에 남는 영화들도 있었다. 영화제에서 주최한 만찬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과 작업방식 등을 설명하던 앤드루 청의 <웰컴 투 데스티네이션 상하이>(Welcome to Destination Sanghai), 사진모델 출신으로 감독이라기보다는 귀여운 악동 같은 1976년생의 재기발랄한 모습을 보여줬던 이세야 유스케의 <가쿠토>(Kakuto), 박찬옥 감독만큼이나 수줍음을 많이 타 사람들과의 접촉을 어려워했던 아이슬란드 출신 다구르 카리의 <노이 알비노이>(Noi Albinoi) 등.
특히 앤드루 청은 본인이 직접 제작, 연출, 촬영, 편집을 담당하며 순발력 있게 비디오로 작품을 만들었는데, 최근 상하이 주류사회의 일상적인 하위문화를 컬러풀하고 역동적인 MTV스타일로 선보인다. 결국 시상식에서 <웰컴 투 데스티네이션 상하이>는 심사위원 특별상(Critic’s Special Mention)을 수상했다. 영화제에 참가한 사람들 의견에서 가장 수상 가능성이 많은 작품으로 점쳐졌던 <노이 알비노이>는, 자연의 재난에 대응하는 17살 소년의 태도와 방식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는데 주위의 대단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수상을 하진 못했다.
메인 프로그램에 선보인 작품들은 지난해 부산영화제에 참가했던 것들과 중복되는 게 많았다. 하지만 눈길을 끄는 몇몇 작품들은 항상 상영관을 가득 메웠다. 포스터부터 도발적인 래리 클라크와 에드 라흐만의 공동연출작 <켄 파크>(Ken Park). 데뷔작인 <키즈>만큼이나 파격적인 장면과 적나라한 묘사로 시선을 끈 이 작품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소도시에서 벌어지는 네 가족의 끔찍한 사연들을 보여주고 있다. 감독은, 로버트 알트먼의 <숏컷>에서 보여진 방식처럼 각각의 이야기들을 병렬적으로 늘어놓으며 태연하고 건조하게 비극적이고 위선적인 사건들을 풀어놓는다. 이미 많이 알려졌지만, 안정되고 개성적인 연출력을 다시 보여준 감독은 단연 폴 토머스 앤더슨을 꼽을 수 있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그는, 사운드를 이용한 화면의 충격과 긴장 그리고 상징적인 파스텔 색감과 독특한 카메라 움직임 등으로 이전작인 <부기 나이트>나 <매그놀리아>가 허투로 만들어진 게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시네마 리게인드(Cinema Regained) 부문에 선보인 호금전 감독의 <대취협>은, 우연히 보게 되었지만 인상적인 작품으로 남는다. 홍콩 무협영화의 유명한 제작자인 ‘란란 쇼’의 쇼브러더스에서 1966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이야기 구성의 상업적 진부함을 제외하면 액션연기와 연출, 편집 등에서 요즘 무협액션영화와 비교해 손색이 없다. 홍콩의 무협액션영화의 기본 전형은 이미 그 시절 호금전 감독이 완성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 작품이었다.
이번 영화제에 참가한 국내 작품들은 폐막작인 <취화선>을 비롯해 <오아시스> <생활의 발견> <죽어도 좋아> <로드무비> 등이었다. 이중 <오아시스>의 이창동 감독과 명계남 대표, <로드무비>의 김인식 감독은 영화제에 와서 일반 관객 시사와 Q&A 등의 행사에도 참여했다. 영화인은 아니지만 영화제에 참석한 주목할 만한 한국 인사로 가장 눈에 띄었던 사람은, 네덜란드 축구리그에서 뛰고 있는 송종국 선수였다. 그는 <오아시스>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는데, 그가 소속된 페예노르트 구단은 로테르담을 연고지로 하고 있다.
역시, 상받는 순간은 감동의 도가니
타이거상 부문 시상식은 폐막 이틀 전에 열렸다. <질투는 나의 힘>의 공식상영 두 번째날 로테르담에 도착한 부산영화제 김동호 위원장은 나름대로 동향을 파악하면서 조심스레 수상 가능성을 점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시상식장에서, 장만옥의 전남편으로 더 잘 알려진 프랑스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드디어… 정말로… “”을 호명하는 순간, 뭉클함과 아득함이 함께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항상 그렇지만, 수상을 하는 박찬옥 감독은 담담한 편이고 오히려 통역을 맡은 이픽처스의 조은정 실장이 더 상기된 표정이었다. 객석 맨 앞에 자리한 김동호 위원장은 연신 셔터 누르기에 바빴고….
타이거상 공동수상 작품은 러시아의 라리사 사딜로바 감독의 <위드 러브, 릴랴>와 아르헨티나의 산티아고 로자 감독의 <스트레인지>였다. <위드 러브, 릴랴>는 러시아 시골에 사는 평범한 여인의 삶과 일, 남자관계 등을 다큐멘터리적 느낌으로 냉정하게 응시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그리 크게 울림이 있지는 않았지만 여성 감독의 세심함이 돋보였다고 생각했다. 산티아고 로자 감독은 수상소감에 5분 이상을 말하는 등, 상을 받은 것에 꽤나 감동스러웠던 표정이었다. 그는 이 영화제가 지원하는 허버트 발스 펀드자금으로 <스트레인지>를 만들었는데, 또다시 같은 영화제에서 경쟁부문상을 타게 된 것이다. 수상한 세 작품을 놓고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들어온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적인 이야기, 인간관계의 섬세하고 미묘한 문제를 보여준 작품들이라는 점. 로테르담영화제의 성격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영화제 수상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다음날 이른 새벽, 스키폴 공항으로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우연히도 공동수상한 로자 감독을 만났다. <스트레인지>를 약 5천달러에 만들었다는 그는, 제작비 마련의 어려움을 떠듬거리는 영어로 토로한다.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Q&A 시간에 토니 레인즈가 물어본 게 생각났다.
“… 이 영화를 앞으로 어떻게 관객에게 보여주고 만나게 할 것인지…?”
“… 그건 앞으로 풀어야 할 임무이자 숙제라고…” 말했던 거 같은데….
어스름한 새벽 여명 너머 차창 밖으로 불 밝힌 꽃 온실 농장이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