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빛과 어둠의 포옹,<국화꽃 향기>의 장진영+박해일
2003-02-12
글 : 김현정 (객원기자)
글 : 황혜림
사진 : 정진환

장진영과 박해일은 오래 사랑을 기다린 연인답지 않게 웃음이 많았다. 차가 막힐까봐 너무 일찍 출발한 박해일은 뒤늦게 도착한 장진영에게 낮은 웃음기가 머무는 목소리로 설인사를 건넸고, 선배답게 카메라 앞에서 박해일을 잡아끌었던 장진영은 누나 같고 친구 같은 탁 트인 웃음으로 반가운 마음을 드러냈다. 희재와 인하, 처음 맡은 국화꽃 향기와 국화꽃 같다는 고백으로 건넨 첫 키스를 9년 동안 간직한 연인. <국화꽃 향기>는 대학 선배 희재를 사랑하던 인하가 약혼자의 죽음 때문에 스스로를 벌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희재를 다시 빛 속으로 끌어내는 영화다. 그러나 웃음을 되찾은 어느 날, 희재는 자신 몸 속에서 자라나는 아기와 자신을 파먹는 암세포의 존재를 감지한다.

전형적인 눈물의 러브 스토리다. 그러나 일본 삿포로에서 찍었다는 포스터 사진엔 너무 일찍 이별하는 젊은 연인이 아니라 삶의 처음과 끝을 같이한 듯한 평온한 부부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어른스러운 박해일 덕분이었을까. “해일씨는 진실해서 좋아요. 생긴 것부터. 천진난만한 아이 같지만, 많은 일을 겪은 사람이에요.” 혹은 마음 넓은 장진영 덕분이었을까.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질투는 나의 힘>은 모두 연극했던 선배들과 같이 한 작품이었어요. <국화꽃 향기> 같은 작품은 처음이었는데, 장진영씨가 많이 풀어줬죠.”

장진영은 밝고 화사하며, 박해일은 수줍고 우울하다. 그러니, 두사람의 포옹이 어울린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스크린의 마법이 두 사람을 어떻게 잊을 수 없는 연인으로 만드는지는 <국화꽃 향기>가 피어나는 2월말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브리짓 존스의 비련 - 장진영

장진영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도착했구나, 알아볼 여유도 주지 않고 혼자 검은색 소파에 몸을 파묻은 그녀는 검은색 한 가지만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까만 단발머리, 까만 진바지, 까만 눈동자. 눈에 익은 모습보다 한겹 더 팬 마른 얼굴만 파르스름한 빛을 안고 있던 건 <국화꽃 향기> 때문이었을까. 사랑하는 사람 모두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뒤, 한사코 피하려 했던 어린 남자의 사랑을 받아안은 희재. 죽음과 재회를 건너 또 다른 죽음과 마주하는 희재의 9년에 걸친 사연이, 맑은 피부보다 더 솔직하게 나이를 드러내는 장진영의 성숙한 목소리로 전해졌다. “희재가 아이를 낳는 수술대에 누워서 이런 생각을 해요. 인하씨, 집에 같이 못 가서 미안해, 그래도 혼자 안 가서 다행이다…. 그런 한마디가 너무 슬펐어요.” 너무 감정을 아낀 것 같아 약간 후회도 된다고, 장진영은 말했지만, 전혀 슬퍼 보이지 않는 얼굴로 들려준 그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오래오래 남았다.

장진영이 포근한 멜로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 다음으로 선택한 <국화꽃 향기>는 많은 사람들을 울린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남들은 다들 멜로로 출발하는데 나만 못해본 것 같아서, 도전하는 마음으로 출연한 영화. 눈물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은 원작에 비해 시나리오 과정에서 손을 본 <국화꽃 향기>는 한결 담백하고 절제돼 있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 절제는 배우에겐 항상 팽팽한 긴장을 유지해야만 하는 부담이기도 했다. “<국화꽃 향기>의 사랑은 정말 오래 가요. 그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야 하는데, 영화는 몇년 세월을 건너뛰거든요. 몇 장면만으로 미묘하게 변한 모습이나 굴곡 심한 삶을 표현하려다 보니까 얼마나 드러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희재는 감정을 마음 속에 쌓아놓고 살지만, 배우는 그걸 관객에게 표현해야 하는 거잖아요.”

<국화꽃 향기>에 내레이션이 흐른다면 이런 말투가 아닐까 싶을 만큼 가라앉은 목소리. 촬영할 때의 감정이 아직도 남아 얼마든지 퍼올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장진영은 옷을 갈아입고, 파트너 박해일과 로맨틱코미디 같은 발랄한 장면을 연출하고선 한 단계 높아진 볼륨으로 돌아왔다.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물고기들이 막 지나가더니, 나중에 보니까 온몸이 해파리에게 물린 거예요. 불긋불긋한 자국이 절대 안 없어져서 얼마나 창피하던지.” 죽어가는 희재를 연기하기 위해 달걀과 요구르트만으로 연명하면서 다이어트를 했지만 “적응도 빠르고 포기도 빨라서, 어, 이렇게 먹으니까 되게 맛있네”라고 좋아했다는 장진영. 영화 속에 빠졌다가도 금새 “브리짓 존스 같은” 본래 캐릭터로 돌아오고, 그러다가도 다시 어둠에 갇힌 상처많은 여자로 회귀하는 그녀는 배우와 보통 사람을 쉴새없이 오가는 다이내믹한 인터뷰를 끌어나갔다.

장진영은 <국화꽃 향기>가 끝나자마자 <싱글즈> 촬영을 시작했다. 스물아홉 생일날 애인과 직장을 동시에 놓친 싱글 ‘나난’은 “감정에 솔직하고, 엉뚱하고, 발랄한 캔디” 같아 그 자신과 꼭 닮았다는 캐릭터. 성격 다른 두편의 영화를 연이어 터치한 탓에 머릿속이 헝클어져버렸지만, 장진영은 아직 한번도 배우라는 직업이 싫어진 적이 없다. “데뷔한 지 6년 됐는데 1년에 한편꼴로 영화를 했더라고요. 올해는 많이 해야지, 마음먹었어요. 사실 좀 어지럽긴 해요.” 그녀는 전날 잠을 못 잤고 내일 또다시 잠을 못 잘 것이기 때문에 몰래 하품을 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하품은 누구에게도 피로를 전염시키지 않고 상쾌하게 사라졌다. 스튜디오 바닥 전체가 울릴 만큼 세게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지고서도 누구보다 크게 웃던 장진영은 어느새 하품과 피로를 기운차게 먹어치워버린 것 같았다.

고독은 나의 힘 - 박해일

박해일은 온순한 여유를 띤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티셔츠에 트레이닝복 바지, 잠시 집 앞에 나온 사람처럼 편안해 보이는 차림새. 약속시간보다 일찍 스튜디오에 도착해서는, 뒤늦게 들어선 기자의 멋쩍은 인사에 되레 “뭐가요?” 하며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저는 영원이라 말했지만 그녀는 순간이라고 말했던’ 스무살의 열병을 7년 동안 간직한 채 희재의 마음을 기다린 <국화꽃 향기>의 인하처럼, 박해일은 쉽게 흔들릴 것 같지 않은 한결같음의 공기를 품고 있었다. 즉흥적인 속도에서 한발 물러난 듯, 또래들과는 좀 다른 리듬을 가진 배우. “세탁기도 꼭 남들 다 자는 밤에 돌리게” 되는 야행성 지향 자취생활을 얘기할 때는 오랜 친구처럼 살갑기도 하고, 인터뷰에서 많이 물어오지만 “이 영화는 딱 뭐다, 어떻게 했다”고 한마디로 못박는 게 어렵다며 신중히 말을 고를 때는 섣불리 채근하기 힘든 예민한 사색가 같기도 하다.

치유되기 힘든 상처를 안은 희재를 지순한 사랑으로 감싸는 인하로 출연한 <국화꽃 향기>는 박해일의 세 번째 영화. 시나리오와 원작인 동명 베스트셀러를 읽고 이내 속편격인 <국화꽃 향기2>를 사서 봤을 만큼 마음이 움직이는 사랑 이야기였다. 하지만 티없이 순정적인 인물이 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방송에서 많이 봐오긴 했지만, 밝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새삼 느꼈다고. 스스로는 “확 빠져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지만,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하는 대사를 담백한 진심으로 소화하기에 박해일은 꽤 어울리는 캐스팅이다. 전작들과 달리 “연극무대 선배들과 같이”한 게 아니었던 현장도, 좀 생소했지만 “언젠가 겪어야 했을” 색다른 긴장을 배우게 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밴드를 이끄는 성우의 아역으로 데뷔한 이후 아직은 돌아갈 기회가 없었지만, 연극은 음악과 더불어 그의 심정적 고향과 같다. “음악적 역량이 뛰어난 건 아니었어도 음악이 좋아서 하고 싶었던” 고교 시절의 꿈을 이뤘다면, 뮤지션이 됐을지도 모를 일. 젓가락으로 책상을 드럼마냥 두드리곤 하던 친구 덕분에 기타와 컴퓨터 음악에 빠진 그는, 대학에서도 메가헤르츠란 밴드에 몸담았다. 잔심부름이 더 많던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는 바람에, 첫 공연의 “원을 푼 건” 뜻밖에 전주영화제의 <와이키키…> 이벤트 무대에서였지만. 재즈 아카데미에 다니며 데모 녹음도 했었으나 “대중가수가 되는 게 아니라면” 모호한 음악의 항로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빙, 비디오방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의 일환으로 오디션을 봤던 96년 말, 아동극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로 연기라는 뜻밖의 돌파구를 찾기 전까지는. 즉각적인 어린 관객의 반응과 함께 호흡하며 “내 것을 퍼뜨리는 듯한” 아동극 때의 첫 느낌, 선배들과 늦도록 술잔과 얘기를 나누다 차비가 없어 목동의 집까지 걸어가곤 했던 기억, 임순례, 박찬옥, 봉준호 세 감독에게 발견되는 계기가 된 <청춘 예찬>까지, 연극의 체험은 박해일에게 현재의 “자양분”이다.

<국화꽃 향기> 외에도 사랑한 여자와 사랑하고 싶은 여자를 차례로 앗아간 남자에게 질투와 인간적인 존경을 동시에 느끼는 20대의 섬세한 내면을 드러낸 두 번째 영화 <질투는 나의 힘>, 선량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유력한 살인용의자로 쫓기는 <살인의 추억>이 올해 개봉을 앞둔 상태. 부쩍 늘어난 주위의 기대가 부담도 되는 눈치지만, “얽매이지 않고” 가고 싶다고 말할 뿐인 그의 소박함은 장중한 다짐보다 미덥다. 박해일 자신이 팬 카페에 올려놓은 푸슈킨의 시구대로, “너의 자유로운 혼이 가고 싶은 대로/ 너의 자유로운 길을 가라”(<네가 황제다. 고독하게 살아라> 중)고 기꺼이 지켜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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