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영화를 본다. 조금이라도 괜찮은 영화는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단한 작품이고, 조금이라도 맘에 들지 않으면 시간 낭비 또는 자신감을 확인시켜준 졸작인 것이다. 나는 영화든 정치든 ‘작은 차이’에 주목하고, 그것을 세계관의 대립으로 확대 해석하여 곧바로 논쟁에 돌입한다. 게다가 오늘 하루하루를 어떻게 하면 잘 넘길 것인지, 재밌게 지낼 것인지 골몰하는 나로서는 쓸데없이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지만, 과거의 정서적 체험을 되새기는 일도 영 기질에 맞지 않는다. 그러니 가장 감명 깊었던 영화는 최근에 본 영화일 텐데, 최근 7∼8개월 동안 제대로 본 영화가 한편도 없다. 프로젝터를 구입하기 전까지는 영화를 꾹꾹 참으리라.
원고 독촉을 받고서도 ‘임박한 마감이 주는 놀라운 효율성’을 믿으며 느긋한 마음으로 지하철을 탄다. 남루한 행색의 외국인 부자가 시선을 끈다. 인도 아리안 계통인 듯한 턱수염의 아버지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고 아들은 한 열살쯤…. 가족을 동반한 외국인 노동자도 있구나…. 나는 그들 모습에서 문득 <정복자 펠레>가 떠올랐다.
<정복자 펠레>를 보며 몹시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저런 작품을 만든 감독이 정말 부러웠다. 저보다 잘 만들지 못한다면 아예 디렉터의 길을 접어야 하는 게 아닌지 갈등했다. 그리고 펠레가 부러웠다. 펠레 아버지는 무뚝뚝한 나의 아버지에 비해 얼마나 자상한가. 열심히 일해 돈도 벌고 재혼도 해서 일요일이면 침대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은 게 꿈의 전부인 그이다. 펠레는 또 얼마나 멋진 형을 얻었는가. 비참하고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아무도 감히 불평 한마디 못하는데 에릭만은 불의를 참지 못하고 행동한다. 그 에릭 형은 펠레에게 농장 안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더 넓은 세상이 있다고, 눈 녹는 봄이 오면 함께 세상을 정복하러 나가자고.
그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펠레였다. 펠레의 꿈은 하루종일 재밌게 노는 것이니 나와 똑같다. 끝없는 호기심에 대책없이 장난기 가득한 펠레의 눈빛은 그 영화를 비참하고 고통스런 이미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정복자 펠레>는 그러나, 내 인생의 영화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조차 자기 인생의 기구함을 어떤 드라마도 따라올 수 없다고들 한다. 나의 연출관은 드라마보다는 다큐멘터리에서 출발한다. 골 세포에 머무는 작품은 <황무지>다. <황무지>는 진짜 잔인하다. 독재가 타도된 직후의 루마니아. 한무리의 집시들이 도시 외곽의 쓰레기 하치장에서 살고 있다. 늘 배고프고 추운 아이들은 쓰레기더미 속에 들어가 종이나 플라스틱을 줍는다. 하루종일 일해도 몇푼 벌지 못한다. 애써 수집한 고물들을 누가 들고갈까봐 밤새 쓰레기터를 지킨다. 다음날 아침 어린 동생들을 목욕시키고 ‘우리는 학교로 간다’.
젊은 여자가 만삭의 몸으로 다 쓰러져가는 움막에서 홀로 쓰레기를 헤치며 살고 있다. 카메라 앞에서 천진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이는 제 인생 앞에서도 그럴 것 같다. 한겨울에 발생한 화재로 젊은 부부가 숨진다. 선거에 출마하기로 한 이웃 마을의 사제는 억지로 장례식을 집전한다. 언제 강제 철거반이 닥칠지 모른다. 철거 싸움이든 다른 이유든 툭하면 어른들은 유치장 신세를 진다. 부모가 집에 없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소년원으로 보내진다. 그래도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게 불안하다. 그런데도… 그곳 아이들의 눈빛은 늘 총총하다. 아이들답게 늘 새로운 놀이를 만들고 규칙을 따진다.
르네 듀보는 아무리 힘겨운 환경에서도 아이들만 잘 지켜준다면 그 사회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집시 아이들이 커가면서 몇이나 그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황무지>를 만든 그 동네 집시 안드레이 슈바르츠처럼 나도 그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다. 함께 있지 못해 미안하다. 다만 안락하고 여유로운 삶을 원하는 대중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