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할 텐데 미안하다고 인사치레로 말을 건넸을 때, 유덕화는 그냥 엷게 웃었다. 2월11일 오후 4시30분, 힐튼호텔. <무간도>의 개봉을 앞두고 그날 아침에 도착한 이후 쉴새없이 기자회견과 인터뷰, 사진촬영을 했다니, 그럴 만도 했다. 인사치레에는 예의바른 정도로만 반응했지만, 질문에 흥미를 느끼면 그는 표정이 많아지는 배우였다. 청춘스타에서 어느덧 중견배우로 자리잡은 세월에 대해 채 물음을 끝내기도 전에 “지금도 청춘스탄데?”라며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싱끗 웃어버리는가 하면, “좋은 사람으로 바뀔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던” <무간도>의 배역 유건명을 얘기할 때는 이맛살에 심각한 주름을 잡았다. <무간도>에서 “연기를 너무 잘한 것 같다”며 부러 잘난 척 폼을 잡다가 웃으며 의자 옆으로 쓰러지듯 기대는 모습이, 도무지 불혹을 넘긴 아저씨 같지 않았다.
확실히 유덕화는 ‘청춘스타’였다. 80년대 중반 이후 홍콩누아르와 액션, 도박영화 등이 유행하면서 떠오른 스타들은 꽤 있었지만, 유덕화는 유난히 청춘의 이미지를 누린 배우일 것이다. 아무렇게나 걸친 듯한 티셔츠와 청바지, <열혈남아>나 <천장지구>의 뒷골목에서 잡초처럼 살아가는 거칠고 반항적인 젊음의 초상이야말로 그를 기억하게 했으니까. 홍콩 스타들의 등용문인 TVB 배우스쿨 출신인 그는, 81년경 TV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래 영화와 음악으로 반경을 넓혀왔다. 가수로도 상당한 인기를 누렸지만, 무엇보다 <지존무상> <정전자> 등 80년대 후반의 도박영화들에서 의리있는 쾌걸 역할로 본격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다른 홍콩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무협, 코미디, 멜로 등 다양한 장르를 누비면서도 의리있는 터프 가이의 잔향을 지녀온 유덕화였기에, <무간도>의 유건명은 색다른 느낌이다. 삼합회의 조직원으로 경찰 간부가 되어 스파이 노릇을 하는 그는, 성공한 삶의 이면에 어두운 비밀을 감춘 일종의 악역. 경찰 엘리트답게 깔끔한 정장 차림에, 감정의 변화를 잘 내비치지 않는 인물이지만, 상사 앞에서 태연히 조직 보스에게 전화를 걸어 암호로 얘기하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할 때 차분하고 절제된 유덕화의 연기는 보이는 것 이상의 뉘앙스를 담고 있다. 스스로도 꽤 만족스러운 듯, 유덕화는 지친 목소리였음에도 <무간도>에 대해서 할말이 많았다.
<결전>외에는 거의 악역을 맡은 적이 없는데, 유건명 역이 왜 맘에 들었나.
사람들이 나는 악역을 맡지 않는다고 생각하더라. 안 할 거라고. 하던 역할만 한다고 하기도 하고.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양조위가 한 진영인 역할을 할 줄 알았는데, 유건명을 맡기더라.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시나리오를 다 읽었을 땐 역할이 맘에 들었다. 악역이기 때문에 큰 도전이었고, 연기자로서는 좋은 기회라 아주 만족한다. 하지만 <무간도>는 연기하기가 참 힘든 영화였다.
청춘스타에서 어느덧 중견배우가 됐다.
너무 옛날에만 집착하지도 않고, 너무 먼 미래만 생각하지도 않는다. 현재에 어떻게 할 것인가가 제일 중요하니까. 난 현재의 모습에 아주 만족한다. 연령마다 좋은 게 따로 있다. 지금 내가 21살짜리 역할을 하면 남들도 웃을 것 아닌가.
수십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스스로 생각하는 베스트 5가 있다면.
<천장지구>는 ‘고혹자’, 건달들의 전형이 된 영화라서 좋다. <신조협려>는 소재가 새로웠고, <암전>은 내 스스로 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 그 전에는 얼굴과 몸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면, <암전>은 눈빛으로도 감동을 줬다고 생각한다. <암전>을 했기 때문에 <무간도>를 할 수 있었다. <수신남녀>는 완전히 다른 유덕화를 보여줄 수 있어서 좋다. 100% 뚱보로 나오는데, 처음 시작할 때부터 유덕화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여름에 찍었는데 특수분장 때문에 땀을 많이 흘린 기억이 난다.
팀웍영화사를 차리고 제작자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내년쯤 <메이드 인 홍콩> 같은 예술영화를 하나 찍을 것 같다. 프루트 챈이 아니라 담가명과. 지금 시나리오 개발 중이다.
로버트 드 니로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 밖에 영향을 받은 배우나 감독, 작품이 있다면.
드 니로는 많은 영향 중 하나다. 말론 브랜도. <열혈남아>를 두고 사람들은 내가 제임스 딘에게 배웠다고 했는데, 사실은 말론 브랜도였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같은 연기. <대부>도 참 좋아하는 영화다. 멋있는 영화, 남자영화다.
앞으로의 계획은.
올해 <건미선생>(健美先生)이라는 두기봉의 영화를 1편 찍을 예정이다. 아놀드 슈워제네거처럼 근육질 남자에 대한 영화다. 8월1일에는 홍콩에서 콘서트도 계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