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아오야마 신지와 이란의 바흐만 고바디, 한국의 박기용 감독이 제4회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의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갔다. ‘디지털 삼인삼색’은 디지털과 대안영화에 주목하는 전주영화제가 첫해부터 운영해온 프로젝트. 제작비 5천만원을 지원받은 세명의 감독이 30분 분량의 디지털영화를 연출한다는 전제만 같을 뿐, 영화의 형식과 내용은 철저하게 감독의 자유에 맡겨진다. 2월17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는 아오야마 신지와 박기용 감독, 민병록 전주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수완과 김은희 프로그래머 등이 참석해 올해 ‘디지털 삼인삼색’의 개요를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항공권을 구하지 못해 불참했다.
비로소 나를 말한다, 아오야마 신지
아오야마 신지는 <유레카>가 2000년 칸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감독이다. 러닝타임이 3시간37분에 달하는 이 영화는 컬러로 찍어 흑백으로 탈색한 모노톤 화면 위에 세상이 받아주지 못하는 상처를 지닌 두 아이와 한 남자, 막 어른이 되려 하는 한 청년의 고통스러운 치유 여행을 담고 있다. 이 영화의 중심이 되는 사건은 버스기사와 중학생 남매만 남기고 모든 승객이 사살된 버스인질사건. 그러나 아오야마 신지가 이번에 찍는 디지털 영화 <처마 밑의 부랑자>(Desperado Under the Eaves)를 이해하기 위해선 뒤늦게 이 상처받은 사람들 틈에 끼어든 청년 아키히코를 기억해야 한다. 아키히코는 아오야마 신지의 데뷔작 <헬프리스>에도 등장했고, <처마 밑의 부랑자>에선 주연으로 등극하게 될 캐릭터. 아오야마 신지는 사이토 요이치로가 연기해온 아키히코가 자신의 일부를 담고 있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96년작인 <헬프리스>의 아키히코는 따돌림당해 비뚤어진 심성을 가진 10대 후반의 소년이었다. 그는 <유레카>에서 좀더 성숙해진 마음을 보여줬고, <처마 밑의 부랑자>에선 더 어른이 돼 있지 않을까 싶다. 내 20대 후반의 1년을 그에게 투영할 생각이다.”
<와일드 라이프> <차가운 피> <쉐이디 글로브> 등 B급 액션영화 장르를 차용해 일본의 차가운 현실을 관조하는 영화를 만들어온 아오야마 신지는 정작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본 적은 한번도 없다고 했다. <처마 밑의 부랑자>는 영화를 꿈꿨지만 어떤 일도 얻을 수 없어 날마다 술마시고 세상을 욕하며 외롭게 지냈던 그의 이십대 후반, 지옥 같던 시간이, 현실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디지털 화면 속에 살아나는 영화가 될 것이다.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아오야마 신지 감독은 답답한 일본에서 돌파구를 찾기위해 전주를 방문했다.
아오야마 신지에게 디지털은 낯선 매체가 아니다. 99년 <쉐이디 글로브>로 35mm 필름과 디지털 영상의 조합을 실험했던 그는 이미 여섯편 정도 디지털 극영화와 단편,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아오야마 신지는 “언제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처럼 거대한 SF가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연습삼아” 디지털영화를 찍는다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정작 그의 카메라가 향하는 곳은 인파와 속도에 밀려 쫓기듯 사라지는 작은 순간들이다. 배우 다섯명과 스탭 여덟명으로 꾸려진 <처마 밑의 부랑자> 팀은 아오야마 신지의 친구가 살고 있는 조그만 아파트에서 촬영을 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는 아직 모른다. 기타를 치는 청년 아키히코, 염불만 외우는 옆집 주인, 아파트에서 쫓겨나고 싶어하는 중년 남자. 이들이 전부이다. 전주영화제에서 누가 처음 자신에게 메일을 보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오야마 신지는 답답한 일본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디지털 삼인삼색’에 참여했다. 그 돌파구가 무엇일지, 아키히코가 어디에서 멈춰설지, 아오야마 신지는 그 자신이 살았던 일상 속으로 돌아가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探索>을 길을 떠나며, 박기용
박기용 감독도 자기 영화의 끝을 알지 못한다. 디지털 장편영화 <낙타(들)>을 연출했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의 한명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하는 그는 “어떤 영화를 찍을지 끝까지 정하지 않겠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볼 생각”이라고만 말했다. <디지털 探索(탐색)>이라는 제목이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박기용의 영화는 디지털카메라를 직접 든 감독이 찍고 싶은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영화이기 쉽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면 배우 몇명을 등장시키는 극영화가 될지도 모른다. 박기용은 이 영화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인 동시에 전작 <낙타(들)>을 정리하는 과정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낙타(들)>은 결혼한 두 남녀가 월곶에 가서 회를 먹고 노래방에 가고 여관에서 잠자리를 갖는 하루를 디지털카메라로 뒤쫓는 영화였다. 영화 속 남녀의 비루한 불륜을, 의식하지 않는 사이 드러난 배우들의 틈새와 뒤섞은 이 영화는, 박기용에게 디지털이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디지털은 30∼40분까지도 끊기지 않고 한번에 찍을 수 있다. 필름의 몇배다. 당연히 필름과는 찍는 방식이 달라지므로, 찍는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 디지털카메라는 매우 가벼워서 35mm 카메라가 포착하지 못하는 순간을 담는 것이 가능하다.”
앞으로 디지털영화를 계속 찍을지에 대한 고민을 풀기위해 다시 카메라를 든 박기용 감독.
박기용은 이미 촬영을 시작했다. 8mm 카메라를 들고다니던 학생 시절처럼 자유로워지기도 했지만, 누구나 사용할 줄 아는 디지털카메라로 혼자만 찍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자니 시험치는 학생처럼 초조하기도 하다. 혼자 카메라를 들고 서울 거리를 찍는 그를 사람들은 아시아 어디쯤에서 온 관광객으로 생각하겠지만, 그 순간이 박기용에겐 “앞으로 디지털영화를 계속 찍을지 결정하는” 중요한 시간일 것이다.
국경에서 전해온 고향의 노래, 바흐만 고바디
바흐만 고바디는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지대 쿠르디스탄에서 한국행 비행기가 있는 두바이까지 올 수 있는 비행기 티켓을 구하지 못했다. 대신 서면으로 몇 마디를 전해온 그의 영화는 <다프>, 다른 두 감독처럼 시작은 있으나 끝은 알 수 없는 영화다. 바흐만 고바디는 두장짜리 시놉시스만 들고 <고향의 노래> <술취한 말들의 시간>을 찍은 쿠르디스탄에서 촬영을 시작할 계획이다.
영화제목인 다프는 양가죽을 씌운 아랍 지역의 대중적인 타악기다. 악사들이 다프를 두드리며 노래를 시작할 때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차례로 모여드는 광경을, <고향의 노래>는 보여준 적이 있다. 고향을 빼앗긴 쿠르드족에게 다프와 다프에 실린 노래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방인은 알 수 없다. 다만 늙은 악사에게 건네는 한 노파의 하소연, “당신은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당신이 사라진 뒤 우리에겐 노래를 불러줄 사람이 없었어요”라는 말에서 고된 삶을 달래는 노래의 생명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다프>는 다프를 만들어 팔면서 직접 연주하기도 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가난한 거리의 음악가 파에는 세명의 아내와 열한명의 아이들과 함께 다프를 팔아 생계를 지탱한다. 그는 아주 적은 대가를 받고 다프를 연주하기도 하며,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밤마다 다프 연주하는 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파에와 그 가족, 가난한 거리의 사람들에게 음악은 삶의 처음과 끝을 같이하는 동반자다.
바흐만 고바디는 단편과 다큐멘터리 작업을 주로 하다가 <술취한 말들의 시간> <고향의 노래>를 만들었다. 칸영화제 황금카메라 상을 수상한 <술취한 말들의 시간>은 몸이 불편한 쿠르드족 소년이 노새 행렬에 실려 눈쌓인 산맥을 넘는 여정을 따라간다. 기운을 내기 위해 술을 마신 노새들은 술기운에 취해 주저앉지만, 위기의 순간 강인한 다리에 힘을 주며 다시 일어선다. 화학무기 때문에 목소리를 빼앗긴 여가수가 험한 땅을 가로질러 자신을 찾아온 옛 남편의 뒷모습만 바라보는 <고향의 노래>의 마지막 장면 역시 새 터전을 찾아가는 어린 소녀의 운명을 삽입해 허황되지만 않은 희망의 기운으로 끝을 맺는다. <다프>도 그런 영화가 되지 않을까. 적은 인원으로 빠르게 작업할 수 있어 디지털카메라를 좋아한다는 바흐만 고바디는 그럼에도 35mm의 한 프레임을 찍을 때와 같은 정성으로 디지털영화를 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성이 깃든 <다프>는 ‘디지털 삼인삼색’을 기대해도 좋을 프로젝트로 만들어줄 것 같다.
남은 건, 대안과 전망이 아닌 참여
<처마 밑의 부랑자> <디지털 探索> <다프>는 4월5일까지 완성해야 하는 영화들이다. 올해부터 영화사의 지원을 받는 대신 직접 스폰서를 받기로 한 전주영화제는 3회까지 그러했듯 이번에도 어떤 공통점이나 전망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제작발표회장에선 ‘디지털 삼인삼색’이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차이밍량과 지아장커, 왕샤오솨이, 박광수 등 아시아의 대표적인 감독들이 이 소박한 프로젝트에 이끌렸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 참가하는 세명의 감독들에겐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4월25일부터 5월4일까지 열리는 전주영화제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