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최고의 여자배우는? 할리우드의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돌아오는 답은 뻔할 거다. “그야 메릴 스트립이지.” 진정으로 그렇게 느껴서인지, 고귀한 명성의 위세에 눌려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는 정황도 있다. 우선 그녀는 아카데미상 최다 후보 지명자다. 메릴 스트립은 <어댑테이션>으로 올해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면서 캐서린 헵번이 갖고 있던 기록을 깨고 13번째 후보 선정이라는 영예를 품었다. 이런 ‘오스카 통계학’만이 그녀의 지위를 보증하는 건 아니다. 스트립과 함께 작업해본 동료 배우나 제작진은 입에 침이 마르랴 칭찬을 쏟아낸다. “그녀와 함께 일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댄서와 춤을 추는 느낌”(잭 니콜슨), “할리우드에서 그녀보다 더 훌륭한 장인은 없다. 그녀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She’s as good as it gets)(로버트 레드퍼드) 등의 말은 ‘립서비스’로 치부하기엔 지독히 격한 찬사들이다. 기네스 팰트로는 1999년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자리에서 “메릴 스트립은 관객에게 여배우도 다양한 역할을 연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고 감사의 뜻을 밝혔을까. 그녀에 대한 칭찬 릴레이는 최근작 <디 아워스>에 함께 출연한 배우들에게로 이어진다. “영화를 찍는 도중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메릴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니콜 키드먼에 이어 에드 해리스도 “메릴 스트립은 정말 겁이 없다. 연기에 있어 그녀가 가기를 두려워할 곳은 없다”고 극찬한다.
최근작 <디 아워스>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출판사 에디터 클래리사 본. 동성애 파트너 샐리, 딸 줄리아와 함께 생활하는 그녀는 젊은 날 연인이었으며 작가인 리처드(에드 해리스)를 돌보며 살아간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하룻동안 그녀는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 기념 파티를 준비하면서 자신의 존재의미에 관해 고민하게 된다. 리처드에 대한 지극 정성의 이타주의가 결국 자기만족이라는 이기심의 연장일지 모른다는 회의가 치밀어 오르며 그녀의 내면은 갑작스런 구덩이에 놀란 다리처럼 휘청거린다. 타자의 불행과 자신 안의 불행을, 죽음과 삶에 대한 절실한 욕망을 동시에 바라보는 스트립의 연기는 객석을 긴장감으로 충만하게 한다.
<디 아워스> 속 메릴 스트립이 전하는 모순의 긴장은 단지 연기에서만 우러나오는 게 아니다. 이마와 눈가, 입가에 진하게 주름 팬 50대 중반의 외모는 거역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하지만, 잭 니콜슨이 “그녀의 신비”라고 말하는 “모나리자의 미소”는 여전히 청초하고 싱그럽다. 호호 할머니가 되더라도 그 묘한 미소의 광채만은 지속될 거란 듯 말이다. “여배우로서 외모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끔찍하고도 끔찍한 덫에 걸리는 거예요. 연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보이는지에 무관심해야 하죠”라는 스트립의 이야기는 결코 ‘핑계’가 아니다.
자신을 버리고 리처드에 무한한 애정을 쏟는 클래리사의 모습은 현실 속에서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스크린 밖의 메릴 스트립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여성인권단체 ‘Equality Now’나 환경단체 ‘American Forests’를 비롯해 교육, 문화, 질병과 가난퇴치 등을 목표로 삼는 20여개의 사회단체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연기를 하면서 한 가지 삼가는 것이 있다면, 그건 자신의 경험을 영화 속에 녹이는 일이다. 그녀가 이 생각을 굳히게 된 계기는 <소피의 선택>이었다. 두명의 아이 중 나치의 가스실로 보낼 한명의 아이를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주인공 소피 역의 그녀는 당시 실제로 한명의 아이를 두고 있었다. “연기를 하면서 ‘실제로 내 아들을 잃는 것은 어떨까’ 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단 말이에욧!” 자신의 체험을 대입하는 대신, 그녀는 자신 안에 잠자고 있는 캐릭터를 끌어낸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찍을 때, 난 아이가 없었는데도 내가 되어야 할 엄마의 상(像)은 이미 내 안에 있었거든요. 내 생각에 배우들은 자기 안에 있는 악마성, 잔인성, 우아함 같은 것들을 깨워낼 수 있는 것 같아요.”
다가오는 3월23일 밤이면 메릴 스트립의 코네티컷 집 거실 장식장에 세 번째 오스카 트로피가 놓일지 모른다. <디 아워스>와 함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어댑테이션>을 통해 전초전인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을 가볍게 거머쥐었기에 그녀의 수상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트로피를 타기 위해 정치 캠페인을 방불케 하는 홍보전을 벌이는 세태를 강력하게 비난한 바 있는 그녀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다. 미디어의 스타시스템 속에서 상품화되기보다는 스스로와 가족을 지키려는 메릴 스트립답다할까. “저도 이번에 후보로 지명되길 원했어요. 4명의 아이 중 우리 막내만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못 가봤거든요. 막내는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들을, 엄마가 아니라 ‘진짜 스타’들을 보고 싶다네요.”